궁중으로 돌아온 후비 원춘은 그 이튿날 황제를 알현하고 성친을 다녀온
일을 소상히 아뢰었다.

그 성친 이야기는 황제의 침실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황제에게는 여러 후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황제는 세 후비를 특히
총애하였다.

주씨 성을 가진 후비와 오씨 성을 가진 후비, 그리고 가씨 성을 가진
후비, 곧 가원춘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세 후비를 주후비 오후비 가후비로 성만 따서
부르기도 하였다.

주후비 오후비들은 가후비보다 먼저 성친을 다녀왔다.

오후비의 아버지 오천우는 집과는 멀리 떨어진 성밖에 엄청난 넓이의
터를 잡아 후비 별채를 따로 지어 자신의 재력을 과시 하기도 하였다.

그 오후비의 별채는 성친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차라리 후비 별궁이라고
해야 될성싶었다.

원춘은 자기의 성친을 위하여 아버지 가정은 말할것도 없고 가씨 가문
전체가 무리하게 낭비를 한것을 보고 마음이 무겁고 아팠는데 주후비나
오후비의 성친에 비하면 약과인 셈이었다.

"후비, 전에 나에게 이야기해준 그 보옥이라는 동생은 잘 있던가요?

목에 차고 있다는 그 구슬은 여전하고요?"

황제가 사향 향기가 은은히 풍기는 원춘의 따뜻한 알몸을 귀한 항아리
다루듯 부드럽게 이 구석 저 구석 어루만지며 정답게 물었다.

"네, 황제 폐하, 제 동생 보옥은 이제 장셍하여 사내티가 나더이다.

그 통령보옥은 어릴때 그대로 목에 걸려 있더이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동생 보옥이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나 제 앞에서
몇편의 시를 지은 일이 옵나이다"

"혀, 그래요? 어떤 시를 지었길래 그렇게 감탄하였소?

그 시를 암송해 볼수 있겠소?"

황제의 손이 원춘의 봉긋한 젖무덤에 얹혀 있었다.

원춘은 황제의 손의 감축으로 온몸이 자릿 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약한 신음소리를 섞어가면서 보옥이 지은 시 한편을 읊어보았다.

살구나무에 걸린 술집 깃발 손님을 부르고 저 멀리로는 산장이 한채
보이누나 마름 떠 있는 물위에 오리도 둥실 떠 있고 제비는 뽕밭을
날아와 들보에 둥지를 트네 봄날 한 뙈기 밭에 부추잎은 푸르르고
벼 이삭 향기 십리에 향기로워라 태평성세에 굶주리는 자 없건만
어이하여 밭갈이 길쌈을 그리 서두르는가 원춘이 읊은 그 시는 사실은
보옥을 대신하여 대옥이 지은 시였다.

"오, 빼어난 시로고"

황제는 특히 태평성세에 굶주리는 자 없다는 문구로 인하여 기분이
썩 좋은 모양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