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인데도 바람이 몹시 차다.

찬바람 속에서 나무들은 벌써 무성한 잎을 땅으로 보내고 자신은
헐벗고 서 있다.

무소유의 겨울나무들. 썩어 거름이 될 낙엽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거지 성자를 생각한다.

거지 성자 프란체스코가 추운 겨울날 벌거벗고 있었다.

추운데 왜 그러느냐고 묻자, 다른 사람에게 베풀것이 없으니 고통이라도
함께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가.

많이 베풀어도 될 사람들이 더 인색하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든다.

빼앗고들 있다.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보태주는 격이다.

한 그루 나무보다 더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니.

새삼 내가 나무가 아니라 사람인 것이 부끄러워진다.

이래저래 세상이 잘 돌아가지 않고 있다.

분명 난세인데도 현자는 보이지 않는다.

지저귀던 새떼들이 숲으로 날아가 숨는 것은 하늘에 솔개가 날고
있을 때라고 했는데 지금이 그런 때는 아닐까.

나무가 잘 자라도록 하려면 나무의 본성을 존중해야 하듯이 국민들을
잘 살게 하려면 사람의 본성을 존중해야 함이 상식이다.

나무의 본성이나 사람의 본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무는 곧고 바르게 자라려 하고 뿌리는 단단히 내리기를 원한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툭하면 흙갈이를 하고 뿌리가 단단한가
나무를 흔들어 보기도 한다.

그것은 나무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것일 뿐이다.

나무의 본성이나 식목법을 정치에 응용한다면 온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옛 선비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국민들이 믿고 선택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가.

국민을 위해 죽을 수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국민을 죽이고 있다.

도연명 처럼 "귀거래사"를 쓴 정치인도 없고 유곡원 처럼 "안면문답"을
쓸 공직자도 없다.

귀거래사는 도연명이 관가의 부패에 염증을 느껴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쓴 것이며 안면문답은 얼굴에 대한 글이다.

눈 코 입 귀처럼 제대로 역할을 하지도,도움을 주지도 못한 채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눈썹에 대해 유곡원이 쓴 수필이다.

약자의 고통을 먹이로 먹어치우는 강자들은 결국 탈이 나게 마련이다.

베풀지 않고 소유만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강한 나라가 될수
없다.

지도자들이 그럴 경우엔 더욱 그렇다.

비록 가난하고 명예는 없다 하더라도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고통을 누가 감히 경멸할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에게 요즈음의 세상살이는
너무 허탈하다.

허탈하다 못해 살기 싫다고까지 한다.

한 물에 두 번 발을 담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덕성과 지혜로 드러나던
인간의 차이가 신분으로 구분되고 있다.

마음 좋은 것보다 몸 좋은 것이 더 낫고, 몸 좋은 것보다 얼굴 좋은
것이 더 나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정신보다 외모를 더 중시하다니 한심한 일이다.

그 옛날 신라의 화랑정신이나 조선조의 선비정신, 근대의 동학정신
까지도 희미한 추억 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동방에 등불을 밝히리라던 이 나라가 남의 나라 주간지 표지에
"한국인의 수치"로 오르내린다.

자아를 찾아도 어느 것 하나 잡히는 게 없다.

자아를 찾지말고 무아가 되라던 성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창밖엔 바람이 더 세게 불고 있다.

바람이 부니까,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조금은 있다고들 하니까,
그래도 살아봐야 할까 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