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생.

요즈음 50줄에 접어들면 "쉰세대"로 불리며 명예퇴직 운운하는 시대에
85세의 현역은 부러움을 사기에 족하다.

김태현옹은 전문기사사단으로 한국기원 소속 132명의 기사중 현역
최고령이다.

김옹은 경남 창원출신으로 대전에서 자랐다.

일본 중앙대전문부 법과를 나와 경제학부1년을 수료하고 전쟁통에
중국 황동성으로 건너가 두부 콩나물 잡화 등 닥치는대로 장사를 하다가
해방후인 46년에 귀국했다.

대전중학교(당시 5년제)영어교사로 재직하던중 44세의 나이로 54년에
입단, 지난해 94바둑문화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홍익동의 한국기원에서 김태현 사단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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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언제 배우셨습니까.

"금산에서 보통학교 4학년때 친구들이 바둑 두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게 됐습니다.

금방 배워서 친구형들과도 두곤했지요.

당시 우리고유의 순장바둑도 두고 일본에서 들어온 현대바둑도 두고
그랬지요"

-일본서 대학다닐때 바둑 많이 두셨겠네요.

"일본 7대학리그전에 중앙대대표로 참가하기도 했지요.

당시 2~3급정도 실력이었는데 일본사람들과 두면 포석에선 뒤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반전 전투에 들어가면 싸움을 잘했지요.

우리 순장바둑은 포석이 필요없어 전투에 아주 강했거든요.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강한것 같지는 않은데 잘둔다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곤 했지요"

-당시는 변변한 바둑책도 없었을 텐데... 바둑공부에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자신보다 잘두는 사람과 바둑을 두는 것이지요.

내가 지면 50전, 내가 이기면 안주는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공들여 둔 바둑은 3~4달이 지나도 수순을 기억하곤 했습니다.

요즈음은 나이가 들어 얼마전에 둔 바둑도 첫수부터 생각안날 때도
있어요"

-언제 프로기사가 될 생각을 했습니까.

"해방후 귀국해서 인천의 조선성냥주식회사에서 3년간 경리일을
보았습니다.

아는 사람이 그회사의 관리인이 되는 바람에 근무했지요.

당시 인천에선 이일선사범의 바둑이 제일 셌는데 나와 맞수로 친하게
지냈지요.

그후 1년후배가 대전중학교 교장으로 있어 영어선생으로 7년간
교직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한국기원총무였던 이일선사범이 권유해서 54년의 첫입단대회에
신청서를 냈는데 신청자가 나 혼자뿐이어서 무투표당선된 셈이지요"

-당시로선 프로기사보다 교직생활이 나았을텐데....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었지요.

교원생활을 하면서 바둑대회가 있다면 서울로 올라오곤 했지요.

한번은 시합이 하루 이틀 지연되는 바람에 결국 한달가까이 서울에
머물렀다가 대전으로 내려가 한동안 보충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지요.

그때 제자중에 나웅배 통일부총리 이현우 전청와대경호실장 등이
있지요.

그러다가 조치원농고로 전근을 가게돼 사표를 내고 한국기원 대전지원을
한10년간 맡았지요"

-프로기사의 단위제도를 없애자고 주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든데요.

"초단부터 구단까지의 품계를 구분한 단위제도는 물론 그단위를
결정짓는 승단제도도 일본과 흡사합니다.

오단이하의 기사는 1차예선을 거쳐 승승장구해야만 2차예선에 뛰어들수
있습니다.

육단이상은 고단자라는 프리미엄을 얻어 가만히 앉아있다가 2차예선부터
참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저단신예들의 실력이 고단자에 못지않습니다.

구단이 초단에게 지기 일쑤입니다.

프로체제에서 출발선이 다른 분야는 바둑밖에 없습니다.

프로골프 프로테니스등 그어떤 개인경기에서도 모든 선수들의 스타트
라인은 같습니다.

다만 상위 랭커들에게는 시드가 주어질 뿐입니다.

단의 서열이 이미 실력의 서열과 일치되지않는 현실에서 단위제도를
전면 수정하거나 없애는것이 바람직합니다"

-일본제도를 그대로 도입했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면도
있지 않을까요.

"프로는 실력으로 먹고사는 겁니다.

일본의 프로기사들은 거의다 사제지간으로 우리와 풍토가 다릅니다.

20~30세 정도돼야 오단이상의 고단기사가 됩니다.

그때쯤 돼야 결혼적령기가 되고 그이전은 애들입니다.

부모나 스승의 보호밑에서 사는 때로 돈이 필요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의 저단자대우는 형편없습니다.

또 사제지간이다보니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1회전부터 함께
두는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프로의 권위나 명예는 개인의 인품이나 행적으로 우러나는 것이지
단으로 빚어지는게 아닙니다"

-바둑시합 방식에서도 리그전에 의한 도전기보다 토너먼트제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신다면서요.

"도전5번기, 7번기 하는것도 일본 식입니다.

승부는 단 한판이어야 합니다.

패자부활전을 두는것도 마음에 안듭니다.

스포츠와 바둑을 비유하는게 어줍잖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독 한종목
프로복싱에서만 타이틀매치에 도전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10라운드이상을 뛰어야하는 복싱은 연이어 여러명과 게임을 할수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수가 같은 스타트라인에서 출발하는것이 바람직합니다"

-바둑시 합의시간 제한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둑팬들을 위해서는 단축돼야 하는것 아닐까요.

"대부분 제한시간이 5시간씩이고 국제대회는 3시간씩으로 돼있는데
좋은 기보를 남기기 위해 그정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일본으로 유학간 그해 당시 15세이던 오청원이 일본전문기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그때 본인방 수재는 그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미우리 신문에서 두사람의 대국을 주선했는데 시간제한이
없어 한판이 석달열흘 걸렸습니다.

오청원은 감히 말을 못하고 수재만 "오늘은 이만두자"라는 말을
18번이나 했습니다.

그 기보를 보던 사람들이 이게 바둑시합이냐고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심한 경우는 한사람이 한수씩만 둔 날도 있었습니다"

-한국바둑이 한동안 세계를 제패하기도 했는데 후배 기사들의
바둑실력을 평가하신다면....

"참 잘둡니다.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서봉수,그리고 그뒤를 잇는 사람들도 많고...
김인은 원생시절때 바둑이 늘것 같지않아 보였는데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부쩍 늘어버리더군요.

조훈현은 어릴때부터 재주가 있었어요.

서봉수는 서군 아버지와 내가 친한 친구사이였어요.

그 친구하고는 바둑이 한판으론 못끝나고 여러판 두자고 하는데
쓰러질까 겁나서 최근엔 안두고 있습니다.

이창호는 딱 한번 두었는데 1~2수는 더보는것 같더군요"

-아들 손자뻘 되는 기사들과 바둑을 두자면 재미난 얘기도 있을것
같은데요.

"조훈현이 어릴때 조군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며 동냥바둑을 두곤
했지요.

내가 삼단땐데 하루는 기원에서 만나 몇급이냐고 했더니 3급이라고해요.

그래서 나도 3급인데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백잡고 두자고 장난을 쳐
자꾸 몰리다 지니까 또 두자며 밀릴리가 없다는 표정이에요.

그러다가 조군을 지도하던 이학진씨가 들어와 몇점 놓고 두느냐고
물어 조군이 맞둔다고 하니 너 김선생님한테 넉점을 놓아야 한다고
해서 웃은적이 있지요"

-프로기사들은 보통 몇수앞까지 내다봅니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수십수를 내다본다고 할수도 있고 어떤때는 한수앞도 못볼수도 있는
겁니다.

일본의 어떤 고수가 신과 바둑을 둔다면 6점정도 놓아야 할것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건방진 소리입니다.

흔히 이창호는 반집까지 본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과의 얘기지
신하고는 얘기가 안되는 것입니다"

-바둑실력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선생님한테 배우는것이 첩경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잘두는 사람들의
기보를 놓아보는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보통 끈기가 없이는 꾸준히 복기한다는것이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제대로 배울줄도 모르는것 같아요.

말은 한수 배우겠습니다 하면서도 한번 겨루어 보자는 심사인지 끝까지
두고 계가를 하려고 들거든요.

사범과 끝까지 두어 승패를 따진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연세에 비해 상당히 정정하신데 건강유지의 비결이라도 있는지요.

"바둑을 두고 마작을 하다보니 담배는 많이 피웠지만 술은 안합니다.

대전 집주변의 보문산공원에서 에어로빅도 하고 단전호흡도 하고
있습니다.

책을 보고 혼자서 요가를 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다보니 아무래도 기력이 떨어져 내년봄쯤엔 현역에서 은퇴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평범해요.

운동 음식 할것없이 모든것이 자신에게 맞도록 적당히 하는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 대담 = 양정진 체육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