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가을이었다.

신설된 사정비서실의 선배 한분이 전화를 했다.

뜻밖에 사정비서실에 와서 근무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선배와 친하게 지내는 또다른 선배를 통해 사람을 그르칠 일은
하지말라는 선고의 유훈을 내세워 벗어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뒤 청와대선배와의 면담에서 얘기가 부드럽게 풀리자 나는 참지를
못하고 여러가지를 캐물었다.

아니 기존 수사기관이 얼마나 많은데 청와대사정이 소용한가, 대답은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 부조리도 많지 않은가.

그랬더니 다 손을 대겠다는 결의였다.

그러면 대통령이 관련된 부정부패는 어떻게 할것인가.

당돌하게 한발을 더 내디뎠다.

그는 그런게 있을 수 없다고 불쾌해 했다.

결국 최고권력자가 모르고 하는 짓을 엄히 다스리자는 것이고 그것은
독재를 더 튼튼하게 꾸리자는 짓밖에 안되지 않는가.

관련부처의 공무원이 떡값을 요구하면 얼마를 바쳤는데 여기서 또
뜯느냐고 허탈해하는 기업인이 많던 시절이었다.

1970년 청와대 외자비서실에 근무하던 때 막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되었었는
데 시속 100km가 넘는 고속버스를 들여와야 고객서비스를 개발하고 터미널
운영 노하우도 익힐 수 있다면서 낡은 버스 100여대를 미국회사가 출자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터미널을 지어주는 내용의 합작사업을 검토하게 되었다.

얼핏 구한말의 철도부설권을 팔아 먹은 일이 생각나서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런데 높은 분의 재가를 받으러 올라갔던 비서관은 힘없이 내려오고
말았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뻔한것 아니겠는가.

72년에는 정부공사계약의 공정성을 따지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유학을
가게되어 건설회사 대표들과 송별연을 가졌다.

마침 8.3조치가 있었던 직후여서 사채동결이 화제가 되었다.

그때는 사채를 제일 많이 쓴것으로 소문나 있던 모모회사를 위해서
긴급조치가 발동되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건설회사들이 사채에 시달리고
있었다.(지금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업계를 위해서는 참 잘 됐다는 코멘트를 내놓았더니 일부사장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중에 무슨일을 하게 될지 누가 아느냐,
그냥 돈을 얼마 가지고 오래해도 꼼짝 할수 있겠느냐, 정치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시시한 일을 거들어 주고 비서를 열불나게 보내고 있지 않느냐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 7년이 지난 박대통령말엽에 들은 얘기는 그들의 예감이 얼마나 비슷
하게 실연되었는가를 말해 준다.

재벌총수들은 청와대로 불려갈때 두서너가지 수표를 가지고 가서 눈치
빠르게 주머니를 더듬어내야 했다.

그런데 그 요령은 어느새 백지수표를 들이미는 것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그 백지수표에 금액을 적어넣는 비서관에게도 또다른 백지수표 한장을
질러놓고 나오는 치밀성을 보였다니 뇌물을 주고받는 역학관계와 절묘한
수싸움은 이나라에서 가히 압권을 이룬다 할 것이다.

부마사태가 일어났다.

부패권력내에서 자성파적 입장에 미련을 가지고 관직에 남아있던 것이
여간 후회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의 진전은 새로운 독재가 나타나 구악을 대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부정을 뿌리뽑겠다고 서슬이 퍼렇게 설쳐대던 신군부 개혁세력들이
시국관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쫓아낸 뒤 어떻게 검은 돈을 뜯어 먹었는지는
실감나게 상상할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와서 통치자금운운하는 것은 쥐똥이 방귀 뀌는 소리다.

나도 이따금 하사금을 받은적이 있다.

청와대에서 장관이 타다가 나누어 주었다.

어느때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장관이 공식회의에서 대통령을
각하도 모자라 어르신네 또는 그 어른으로 부르던 어간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쓰며 오히려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내심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했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통치자금도 비자금도 또는 떡값도 법률용어가 아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것 자체가 이나라에 초법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함정을 파는 짓이다.

이번에 노출된 부정부패를 독립된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장물을 갈라쓰고 있는 이나라 인재들이 꾸미고 있는 또하나의
음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부패에는 이나라를 주름잡고 있는 수재들의 간지가 숨어있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고 엄살을 부리며 또는 안보이게 흐려놓기도 하고
누구 덕에 배부른 데 몰라 주느냐며 한심해 한다.

입을 틀어막기 위하여 푼돈을 쓰고 수하것들이 푼돈을 먹도록 적당히
눈감아 준다.

주무르고 고물챙기는 자리에 자란사람들이 몰리고 나면 나머지는 요령좋은
때질에 바쁘다.

어떻게 생산성이 오르겠는가.

수출이 늘어도 또한 수출이 느는 만큼 수입이 더 늘어도, 그리하여 점점
중소기업의 설땅이 좁아져도, 계층간 산업간의 불화로 황폐해진 인성이
아무리 사회적 비용을 끌어올려도, 많은 국민은 일상에 쫓길 뿐이다.

하지만 꼬리무는 환각과 허탈 그리고 무성(무성)을 회심하는 권력이
안전할 수 있는가.

많은사람이 자기가 사는 사회에 애착을 가질때 생산성이 올라간다.

경쟁력이 생긴다.

제대로된 사업가가 돈을 벌수 있어야 하며 무엇이든지 제대로 해보려는
노력들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

폐쇄된 사회에서는 반란만 막으면 되지만 개방된 세상에서는 고가품을
만들어야 이긴다.

냄새나는 공권력을 내세워 속임수를 쓴다고 될일인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