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 깨나 고향땅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어린시절 통영 앞바다에서 고기를 낚고 조개를 줍던 일이 언제나
눈에 선하다"

40년동안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한채 이역땅에서 타계한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78)가 생전에 고향을 못내 그리워 했던 망향사다.

39때인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뒤 세차례나 고향땅에 돌아 오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그의 귀향을 막는 마가 따랐다.

파피국립음악원에서 베를린음대로 학교를 옮겨가 작곡수업을 마친뒤
귀국하려 했던 59년 우연히 몇군데 음악계에 내놓은 작품들이 입상되어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더 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했다.

현대음악의 창시자인 쇤베르크의 기법에 한국고유의 전통음악 색채를
결합시킨 그의 작품들이 큰 반행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반평생을 독일에 붙잡아 놓은 전기가 되었다.

지난 89년3월과 94년9월 두차례에 걸쳐 서울 광주 부산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제"를 계기로 그의 귀국이 실현되는듯 했으나 그의
"친북행적"이 문제가 되어 불발로 그쳤었다.

물론 1967년 "동베를린사건"때 서울로 강제연행되어와 2년여의
옥고를 치루다가 우여곡절끝에 독일로 돌아간바 있었지만 고향땅을
밟아보지는 못했다.

어떻든 그의 외롭고 고달픈 오랜 독일생활은 그의 어머니가 태몽으로
꾼 용꿈대로 그들 현대음악의 세계적 거장 현대음악의 생존5대가로서
자리를 굳혀주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실존을 바탕으로 직관적 환상적인
동양과 조형적 물질적인 서양이라는 두 세계의 대립을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성을 창조해 낸 것을 요약할수 있다.

한국의 궁중음악 요소를 도입한 "예악" 장자의 무위자연사상을 다룬
오페라 "나비의 꿈, 한국적 소재를 줄거리로 한 오페라 "심청" 등에서
그의 독창성은 두드러 진다.

그는 정력적인 삶으로 교향곡 관현악곡 실내악곡등을 80여곡이나
남겨 놓았다.

72년 뮌헨올림픽때는 오페라 "심청" 84년 베를린합창단 100주년기념
공연때는 교향곡1번이 초연되어 그의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더욱 높여
주었고 92년에는 유럽 각지와 일본에서 3개울동안 그의 75회생일음악제가
열려 그가 세계적 대작곡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가 생전에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이고 "자유인"
이라고 다짐했던 정치적 혼란을 제쳐 놓는다면 한민족이 낳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세계적 음악가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오랜 방황끝에 고향에 돌아온 오세이는 되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에나마
고국에서 그의 음악의 위대성이 꽃피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