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졸들이 진종을 풀어주자 진종은 간신히 혼이 돌아와, "응" 소리를
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진종이가 눈을 떴다. 야, 진종아, 내가 보이니? 나, 보옥이야"

보옥이 반가움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응, 보여. 보옥아, 왜 좀 더 일찍 와주지 않았어? 한발만 늦었어도
너를 보지 못하고 갈뻔 했잖아"

"가다니? 어디로 간다는 거야. 여기 이 세상에서 살아야지"

"지금 귀졸들이 저기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어. 잠깐 시간을
내어 너를 만나보러 온 거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쯤 되니 보옥도 진종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말해봐"

보옥이 진종의 입 쪽으로 귀를 갖다대었다.

"보옥이 너와 내가 세상에서 그래도 식견이 높은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잘못된 점이 많았다.

적당히 여자들을 희롱하며 쾌락을 맛보고 사는 것이 사내 대장부로서
마땅히 누릴 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쾌락의 결과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말일세.

보옥이 너는 나처럼 되기 전에 헛된 쾌락의 길에서 돌이켜 뜻을 분명히
세우고 한 세상을 살아가라구.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야"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진종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영영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 진종아, 알았어. 네 말 명심할게"

보옥이 넋이 빠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이어 진종의 몸뚱어리
위에 엎드려 크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보옥의 몸종인 명연과 이귀가 아무리 보옥을 진정시키려 하여도 보옥의
통곡은 그치지 않았다.

밤이 깊어서야 겨우 보옥의 통곡이 수그러들어 이귀와 명연이 보옥을
부축하여 수레에 태우고는 영국부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부터 여러 친척들이 인편에 부조를 보내오고 직접 조문을
오기도 하였다.

보옥은 대부인의 부조를 전하기 위해 또 진종의 빈소로 와 한참을
통곡하다가 돌아갔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보옥은 진종의 영전에서 통곡하기를 쉬지
않았다.

보옥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세상을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는 듯했다.

어떤 때는 후비 별채 누각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 누각 대들보에 목을 매고 진종을 뒤따라가고 싶기도 하였다.

그렇게 스스로 죽음으로써, 진종을 덥석 삼켜버린 그 얄밉고 불가해한
죽음에 대해 온몸으로 항변하고 싶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