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요주의 국가 .. 양봉진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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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민당의 수뇌 에사키 마스미와 말콤 볼드리지 미 상무장관이 도쿄에서
통상협상을 위해 마주앉은 것은 82년2월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미국시장에 쏟아지는 일본자동차홍수로 미국의 대일무역
적자규모가 160억달러에 이른 배경을 거들고 있었다.
미 미주리주 상원의원인 댄 포스(Forth)가 상호주의 원칙을 법률화 한것이
바로 이 즈음이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슈퍼 301조로 발전된 것이다.
미국의 적자규모가 72년 이미 20억달러에 이르고 있었으니까 볼드리지와
에사키간의 회담이 있기까지는 10년이 넘게 걸린셈이었다.
그러나 이들간의 회담이후에도 미일은 10년 가까운 시간을 더 흘려 보내야
했다.
그동안 일본은 특유의 지연과 눈가림으로 일관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인내심은 크게 손상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즈음 미국인들은 많이 변해있다.
어쩌면 70년대 이후 20여년간 일본이라는 늑대소년에게 수없이 골탕 먹어온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그들의 생활규범이자 신사도의 기반이었던 페어게임
(Fair game)정신마저 포기해 버리고 추한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소망스럽지 못하다.
기름을 많이 쓰는 큰차는 매연도 그만큼 많이 내뿜는다.
그러니 페널티 성격의 비용을 더 내야한다는 생각은 당연한 생각이다.
공해에 민감한 미국인들은 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또 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비싼 큰 차를 탈테니까 이들에게서는 세금을
다소 많이 걷고 상대적으로 많이 못 버는 사람들에게는 적게 걷는 일이야
누구나 수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서구인들이 숭상하는 합리성과도 너무나 잘 부합되는 사고의 틀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번 위싱턴 한미자동차협상을 통해 이런 합리적 사고를
하겠다는 한국인들의 자유마저 부정하고 "큰 차나 작은 차나 똑같은 세금을
내도록 세제를 고쳐야 한다는"는 내정간섭을 서슴치 않았다.
젊잖고 합리적이던 신사가 막 나가는 형국이라고나 해야할까.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수 있다.
그러나 팔비틀려 빼앗기고 뒤돌아 서는 사람에게 "약속한대로 하지 않으면
혼 내 주겠다"는 협박까지 해대는 미국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흑자는 고사하고라도 우리의 대미무역적자가 오는 연말까지는 무려 7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형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은 28일 합의문서명을 하고난후 한국을 요주의 국가(Area of Concern)
로 분류해 놓겠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못 믿겠다는 뜻이다.
일본인들과의 악몽같은 경험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굴욕감의 증폭되는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진적 지방세고수는 조세주권사수의 대명사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주권포기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세를 고치라는 미국의 요구는
그런대로 받아들일수도 있다.
국내에서도 이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에게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다시
확인해가며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쌍방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분명 상대방의 자존심을 시험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첫발을 디디는 외국인들 눈에 비치는
한국자동차는 검정색일색이었다.
외국에서는 장례나 의전용으로 밖에 쓰이지 않는 검정차물결은 정말 이상
하게만 비쳐졌을 것이다.
그동안 색갈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름도 생소한 현대 기아 대우차만 가득한
서울은 분명 외계도시로 비쳐질수 있다.
눈에 띌정도로 호혜적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 상황에서야 논리와 합리가
제대로 먹힐리 없다.
국제화를 세계화로 바꿔 놓는다고 우리가 완전한 지구촌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제차를 굴리고, 외제 담배도 피우며, 외제 음식도 먹을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어야 지구촌인으로서 대접받을수 있을 것이다.
받을 것만 받고 줄것은 안준다면 소외의 길밖에 없다.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격언은 가장 경제학적인 격언임에 틀림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일자).
통상협상을 위해 마주앉은 것은 82년2월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미국시장에 쏟아지는 일본자동차홍수로 미국의 대일무역
적자규모가 160억달러에 이른 배경을 거들고 있었다.
미 미주리주 상원의원인 댄 포스(Forth)가 상호주의 원칙을 법률화 한것이
바로 이 즈음이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슈퍼 301조로 발전된 것이다.
미국의 적자규모가 72년 이미 20억달러에 이르고 있었으니까 볼드리지와
에사키간의 회담이 있기까지는 10년이 넘게 걸린셈이었다.
그러나 이들간의 회담이후에도 미일은 10년 가까운 시간을 더 흘려 보내야
했다.
그동안 일본은 특유의 지연과 눈가림으로 일관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인내심은 크게 손상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즈음 미국인들은 많이 변해있다.
어쩌면 70년대 이후 20여년간 일본이라는 늑대소년에게 수없이 골탕 먹어온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그들의 생활규범이자 신사도의 기반이었던 페어게임
(Fair game)정신마저 포기해 버리고 추한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소망스럽지 못하다.
기름을 많이 쓰는 큰차는 매연도 그만큼 많이 내뿜는다.
그러니 페널티 성격의 비용을 더 내야한다는 생각은 당연한 생각이다.
공해에 민감한 미국인들은 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또 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비싼 큰 차를 탈테니까 이들에게서는 세금을
다소 많이 걷고 상대적으로 많이 못 버는 사람들에게는 적게 걷는 일이야
누구나 수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서구인들이 숭상하는 합리성과도 너무나 잘 부합되는 사고의 틀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번 위싱턴 한미자동차협상을 통해 이런 합리적 사고를
하겠다는 한국인들의 자유마저 부정하고 "큰 차나 작은 차나 똑같은 세금을
내도록 세제를 고쳐야 한다는"는 내정간섭을 서슴치 않았다.
젊잖고 합리적이던 신사가 막 나가는 형국이라고나 해야할까.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수 있다.
그러나 팔비틀려 빼앗기고 뒤돌아 서는 사람에게 "약속한대로 하지 않으면
혼 내 주겠다"는 협박까지 해대는 미국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흑자는 고사하고라도 우리의 대미무역적자가 오는 연말까지는 무려 7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형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은 28일 합의문서명을 하고난후 한국을 요주의 국가(Area of Concern)
로 분류해 놓겠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못 믿겠다는 뜻이다.
일본인들과의 악몽같은 경험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굴욕감의 증폭되는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진적 지방세고수는 조세주권사수의 대명사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주권포기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세를 고치라는 미국의 요구는
그런대로 받아들일수도 있다.
국내에서도 이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에게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다시
확인해가며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쌍방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분명 상대방의 자존심을 시험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첫발을 디디는 외국인들 눈에 비치는
한국자동차는 검정색일색이었다.
외국에서는 장례나 의전용으로 밖에 쓰이지 않는 검정차물결은 정말 이상
하게만 비쳐졌을 것이다.
그동안 색갈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름도 생소한 현대 기아 대우차만 가득한
서울은 분명 외계도시로 비쳐질수 있다.
눈에 띌정도로 호혜적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 상황에서야 논리와 합리가
제대로 먹힐리 없다.
국제화를 세계화로 바꿔 놓는다고 우리가 완전한 지구촌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제차를 굴리고, 외제 담배도 피우며, 외제 음식도 먹을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어야 지구촌인으로서 대접받을수 있을 것이다.
받을 것만 받고 줄것은 안준다면 소외의 길밖에 없다.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격언은 가장 경제학적인 격언임에 틀림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