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제품은 세계 어디서든 대접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뉴욕에 발붙이지 못한 은행은 세계일류은행으로 행세할수
없다"

도이치은행 스위스은행 UBS(스위스) 등 유럽의 대표적인 은행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월스트리트(뉴욕의 금융가)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지금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경쟁적인 금융시장.

이곳에 깃발을 내걸지 않고는 유럽에서나 큰소리치는 골목대장에 불과하다
는 것이 유럽 은행들의 기본생각이다.

이들이 월스트리트에 진출한 것은 미국시장이 욕심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은행들의 앞선 금융기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특히 직접금융에 관한한 유럽 은행들은 미국 은행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들의 전략과 노하우를 단기에 배우려면 금융기업을 인수하거나 정예
요원들을 스카우트해야 한다.

이들의 월스트리트 공략은 10여년전부터 유럽시장을 잠식해온 미국 은행들
에 대한 반격이기도 하다.

도이치은행의 경우 자산규모상 세계 10위 은행이며 일본 은행들을 제외하면
가장 크다.

하지만 투자금융 분야에서 미국 은행들에게 번번히 당하고 있다.

최근 도이치텔레콤은 민영화작업을 맡아줄 주간사은행으로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를 선정했다.

도이치은행으로서는 안방에서 뺨맞은 꼴이 됐다.

이런 수모는 사실 80년대 중반이후 수없이 당했다.

도이치은행은 월스트리트 공략에 대단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 은행은 올들어 맨해튼 본부에 축구장만한 대형 딜링룸(수용인원 3백
24명)을 개설했다.

또 지난 2년간 메릴린치 골드만삭스 등에서 4백여명의 정예요원을 데려
왔으며 모기지(주택담보증권) 및 기타 투자부문에는 3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이같은 투자에 힘입어 최근 TVA(테네시강개발공사)의 20억달러 글로벌본드
발행에 간사은행으로 참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전문인력 스카우트에 열을 올리기는 스위스 최대은행 UBS도 마찬가지다.

이 은행 자회사인 UBS증권 미국지점은 스카우트를 통해 8백50명의 사원을
확보했다.

이것도 부족해 4백여명을 추가로 스카우트할 예정이다.

이 은행의 목표는 5년내에 세계적인 종합도매금융업체가 되는 것이다.

스위스은행은 다른 은행들과는 달리 기업인수전략을 쓰고 있다.

지름길을 택한 셈이다.

이 은행은 올들어 영국에서 SG워버그를 인수, 투자은행부문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금융파생상품 전문회사인 오코너 어소시에이츠와
시카고의 자산관리회사 브린슨파트너스를 인수했다.

스위스은행이 노리는 시장은 월스트리트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경을 초월한 국제금융분야에서 최고가 되는게 이 은행의 목표이다.

유럽 은행들은 자산규모로 보나 신용.국제경험으로 보나 미국 은행들에
뒤질게 없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자존심으로 월스트리트를 공략할 수는 없다.

도이치은행의 경우 주식.채권 발행시장 점유율이 0.2%에 불과하다.

스위스은행은 지난해 0.1%이던 회사채 발행시장 점유율이 올해는 0.3%로
올랐으나 주식 발생시장 점유율은 이 기간중 1.5%에서 0.4%로 떨어졌다.

UBS만이 주식.채권시장에서 점유율이 꾸준히 오르고 있을 따름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유럽 은행들의 행보를 지켜보며 일본 은행들의 실패를
떠올린다.

일본 은행들은 80년대 후반 유럽 은행들보다 한발 앞서 월스트리트에
등장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거품경제 후유증으로 부실채권이 급증하자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다.

최근에는 다이와은행이 미국채 투자 실패와 내부통제 미흡으로 11억달러의
손실을 입어 망신까지 당했다.

그러나 유럽 은행들은 "세상이 달라졌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예전과는 달리 자금조달에 나서는 기업들이 외국 은행들에도 기꺼이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이들은 금세기말까지 월스트리트 10대 투자은행에 진입하고 싶어한다.

과연 일본 은행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월스트리트 재공략에 나서기 이전에
이들이 터를 잡을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 김광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