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구 명륜동에 자리잡은 유통 전문업체인 농심가에 들어서면 여느
제조업체의 현장 분위기와는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생산라인이 바쁘게 돌아가는 소리도 없고 연장을 들고 움직이는 근로자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창고로 꾸며진 1층에는 각 매장으로 실려나갈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차곡차곡 쌓여있고 그 사이를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는 지게차와 쉴새없이
드나드는 트럭만이 이곳이 유통업체임을 알게 한다.

윗층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간막이로 잘 정돈된 책상 배치가 눈에 확
들어오며 경영진 업무실과 같은 층에 나란히 배치된 노조위원장실이 이
회사 노사관계를 감지하게 한다.

농심가 노사양측은 서로 대립과 반목이 아닌 동반자적인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한다.

노와 사가 따로없고 단지 우리 삶의 터전만 있을 뿐이며 노사는 한마음
이라는 인식이 서로를 보는 시각이다.

이해수노조위원장은 "지난89년 노조설립때부터 노사가 서로의 문제를
풀어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오늘의 노사관계 정립에 주효했다"며 "서울 대구
대전지역은 아직 노조가 결성되지 않아 부산의 노조활동을 전 종업원이
주시하고 있어 솔직히 부담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게다가 3백50여명의 조합원들이 시내 23개 매장에 흩어져 있어 그만큼
조합원들에 많은 시간 투입이 필요하며 노와 사를 하나로 묶는 가교 역할을
노조가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조는 올 여름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1년중 매출 극대시점인 7.8월을 놓칠 수 없다며 노조가 자발적으로 영업
시간을 30분 연장하고 이를 회사에 통보했다.

당연히 사측은 놀랄 수 밖에 없었고 회사 매출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노조의 이러한 노력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노조위원장은 "회사가 유통시장 개방에 대비한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며 "이런 시기에 노조가 앞장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영업시간
연장 배경을 설명했다.

"역지사지" 마음으로 회사를 헤아렸다는 것이다.

노조는 또 "고객이 기업 생명의 젖줄"이라는 기본 마인드로 전조합원의
친절캠페인을 전개할 예정이다.

이와함께 자판기운영 각종 행사를 통해 얻어진 수익으로 불우조합원
돕기에 나서는등 조합원 복지사업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회사는 서울의 대형백화점이 속속 개점하고 가격파괴가 일반화되는등
유통시장 개방과 함께 무한경쟁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고 물류혁신에 주력
중이다.

올해초 언양물류센터 가동에 들어갔고 지난달 17일에는 대형 할인매장인
메가마켓을 개장 운영중이다.

하루 매출 2-3억원을 기록하는 등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자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이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회사는 그만큼 노조의 도움이 필요한 때라고 느끼고 있다.

21세기를 앞둔 가장 어려운 시점인 지금 노조의 힘만큼 큰 것은 없다는
것이 경영진 모두의 인식이다.

진보적(?) 노조관을 소유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신동익사장은 "노사간
업무분담만 있을 뿐 한가족"이라고 강조한다.

노사불이라는 것이다.

노사문제를 전담하는 부산사업부 조수환이사도 "노조가 불편한 것보다
득이 많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일을 노조와 상의해 의사결정하며 종업원의 애로사항도 노조를
통해 파악해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조이사는 밝혔다.

노사는 현재 급변하는 유통환경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노사는 그러나 내년에 유통시장이 개방되고 국내업체들간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등 위기의식을 느낄만한 현실을 오히려 노사를 한데 묶는 좋은
계기로 보고 있다.

노사가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회사는 21세기를 대비한 미래 청사진을 마련중이다.

유통업이 제조업에 종속되던 시대는 가고 유통업이 경제를 견인하는 역할
에 맞는 회사의 모습을 곧 탄생시킬 예정이다.

노조는 익지 않은 과일을 따먹거나 줄기나 뿌리를 먹겠다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고 열린 과실을 나눠 먹겠다며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파이"가 커지면 몫이 더 커진다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기적 승부보다는 장기적 안목에서 소신과 신뢰를 가지고 조합원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노조가 되고자한다는 이위원장의 노조철학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농심가 노사는 한마음으로 "매출 1조원인 비전 21세기"의 목표를 달성해
유통업체의 선두가 되겠다고 다시한번 결의를 새롭게 다졌다.

<부산=김문권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