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문헌은 개항 후 첫
수신사로 1876년 일본에 다녀와서 김기수가 쓴 "일동기유"였다.

그뒤 1880년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도 복명서에서 철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 주미 조선공사 박정양의 "미속습유"에도 철도에 관한 설명이
나와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훨씬 앞서 후천개벽을 주장했던 학자인 일미 김항이
기차를 "김화도", 비행기를 "풍륜차"라고 부르면서 닥쳐롤 미래사회를
예측했다는 기록을 보면 철도에 대한 관념적 지식은 이마 그 이전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1889년 주미대리공사 이하영이 가져온 철도모형을 고종이
본뒤에야 철도의 효용에 대한 인식의 높아졌다는 것은 거의 확실히다.

그무렵 우리나라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등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돼 있었다.

"서구열강들은 시끄럽게 특권을 요구하며 중구난방의 충고를 떠벌리고
있다. 하여 이 왕국은 한손엔 미심쩍은 만병통치약을 든 낯선 세력에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는 것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적어 놓은 이런
대목은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같은 열강의 각축속에서 용케도 일본을 물리치고 한국 최초의
경인선철도 부설권은 1896년 미국인 모스(J R Morse)가 따냈다.

그러나 모스는 이듬해 인천의 우용현에서 착공만 한뒤 결국 이부설권을
일본철도합자회사에 양도하고 만다.

그로부터 2년뒤인 1899년 궤도부설에 착수한 일본은 그해 9월18일
마침내 노량진~제물포간 33.2km 경인선을 개통했다.

따라사 오늘은 철도창설 96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동안 꾸준하게 성장을 거듭해온 철도의 발전상은 숫자로 보면
놀랍다.

그 길이는 현재 3,558km나 된다. 여객은 1907년의 262만명에서
7억2,300만여명으로 늘고 역은 101개에서 599개로 5.9배, 차량은
1,200여대에서 1만9,000여대로 16배가까이 불어났다.

그나 고질적인 적자, 시설의 낙후, 잦은 사고, 여객서비스부재등 항상
지적돼 오고 있는 철도의 전근대성은 장차 풀어가야할 최대의 숙제로
남아있다.

첨단의 고속철도운행을 앞두고 정부와 철도인 모두가 지나온 96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혁신적인 발전방향을 모색해야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