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명나라와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해 한해에 세번씩 정기적으로
사절을 파견했고 그밖에도 특별한 일이 있을때마다 수시로 양국의 특사가
오갔다.

태종이후 점차 사행이 잦아짐에 따라 40여명으로 구성되는 사신일행중에는
몰래 포물을 가지고 나가 선물용으로 명나라의 비단이나 도자기등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수롭지않았던 이런 "선물용 밀무역"은 얼마않있어 "전문적 밀무역"으로
발전돼 태종17년(1417)에는 톡톡히 나라망신을 시킨 사신의 대듀모 밀무역
사건이 터졌다.

그 해에 정조사로 갔던 이도분과 그를 수행했던 부사 이발이 엄청난 양의
숨겨간 포물을 시장에 내놓자 이 사실을 미리 알아차린 명나라 예도에서
이 물건을 사지말도록 금령을 내려버렸다.

웃음거리가 된 채 귀국한 이들은 "개국이래 가장 큰 죄인"이란 탄핵을
받고 즉각 파직되어 구속됐다.

그뒤부터 사행의 일원인 서장관에게 감찰권까지 부여해 아예 필요이상의
물건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했고 선물용이라도 물건을 사가지고 오는
자가 발견되면 장물죄로 다스리는등 엄한 규제가 뒤따랐지만 사신이
돌아오면 한번씩 조정이 시끄러워지곤 했다.

"명나라 비단은 한낱 아름다울뿐이지 그 쓰임새는 우리의 포물과 다를
것이 없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재산을 기울여 법을 어겨가며 사오기때문에
물가가 뛰어오르고 폐해가 이루 말할수 없습니다"

세종때 우사간으로 당시 사신의 밀무역 피해를 고발한 박관의 상소를
보면 외국것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그때도 지도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수 있다.

성종때의 유명한 문신이었던 서거정도 통역관으로 사신을 따라가는
조숭손에게 베 다섯필을 주고 비단을 사오게 했다가 우찬성직에서 파직되는
망신을 당했다.

이보다 앞서 1451년 성절사로 명에 갔던 박이창은 쌀40말을 숨겨가지고
가서 그곳의 물건을 바꾼것이 발각되자 귀국길에 의주에서 명예를 더럽힌
것을 뉘우치고 자결하기로 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공무로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하면서 넥타이 화장품
백장미기름등을 수백, 수천개씩 보따리채 들고 들어와 빈축을 사고 있다.

물론 장사를 하기위한 것은 아닐테지만 지역구민을 위한 선물용이란
것을 내세워 세금도 내지 않았다니 더 놀랍다.

무엇보다 이런 상식이하의 행동을 하는 특권층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 질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