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함께 경복궁안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해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한뒤 박물관 직원들은 궁안의 건물을 사택으로 쓰면서 야경꾼
노릇까지 해가며 문화재를 지켰다.

한밤중에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미군들이 수집해놓은 민예품들을
훔쳐냈기 때문이다.

6.25동란때도 뉴스에 어두웠던 박물관 직원들은 피란을 가지 못하고
경복궁에서 지냈다.

그들은 북에서 내려온 물질문화보존위원회 파견원의 명령에 따라
평양으로 보낼 중요 유물을 포장하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김재원초대관장을 비롯한 김원용씨등 직원들은 갖은 지연작전을 다
쓰면서 시간을 끌었다.

천행으로 서울이 수복돼 화를 면했던 이때 포장된 유물들은 1.4후퇴때
평양이 아니라 부산으로 옮겨졌다.

자유당 정부가 박물관의 소장품은 생각지도 못하고 "나 살려라"하는
식으로 도망쳤을 때 관장과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미군장성을
통해 차량을 지원받아 벌인 문화재 구출작전이었다.

서슬이 퍼렇던 당시의 경무대비서실에서 실내장식용으로 쓰겠다고
박물관 소장품인 고려청자를 내놓으라고 했을 만큼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건물에서 남산밑의 목조건물로,
여기서 덕수궁 석조전으로,그리고 다시 경복궁 민속박물관 자리로,거기서
또 구총독부건물로 쉴새없이 옮겨다녔다.

이제는 용산 가족공원내에 새건물이 세워질 때까지 피난살이를 해야할
형편이니 국립중앙박물관의 반세기 역정은 민족의 성쇠와 부침을 함께
해온 문화재들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1일로 개관 50돌을 맞는다.

그동안 박물관은 질적 양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개관 당시 5만9,600여점에 불과했던 소장유물은 12만4,000여점으로
늘어났다.

관람객수도 개관하던 첫해 4,500여명에서 지난해에는 216만9,700여명으로
늘었다.

산하에 8개의 박물관이 생겼다.

86년 2,300만원에 불과했던 유물구입예산도 금년에는 25억원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박물관의 중추라고 할 학예연구직은 50여명뿐으로 1년에 한명씩
늘어난 꼴이니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신축박물관 준공에 앞서 학예연구직의 확충방안과 고고학이나 미술사에
치우친 운영의 개선책등 박물관이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활용될수 있게
하는 발전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