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는 사태가 복잡해지면 이귀의 말마따나 자기도 불리해질 것 같아
일단 보옥과 진종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의 뜻을 표시하였다.

보옥과 진종은 화가 풀리지 않아 처음에는 가서의 사과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다가 차츰 누그러졌다.

보옥이 한발 나서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숙장 어른을 만나러 가거나 김영의 고모를 찾아가거나
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겠어. 그 대신 김영이 우리에게 사과를 해야 해"

그러나 김영은 입을 비죽거리며, "내가 왜 사과해? 자기들이 잘못해
놓고" 하며 버티었다.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가서와 이귀가 나서서 김영을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였다.

"진종 도령과 향련은 둘이 손만 잡았을 뿐인데 김영 도령이 둘이
엉덩이를 깠다는 둥, 호떡을 부쳐 먹었다는 둥 거짓말을 하며 놀리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소문을 냈잖아요"

이귀가 김영을 슬쩍 높임말로 올려주며 잘못을 지적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김영 네 말을 믿었으나 이제보니 그게 아니군.
아무래도 김영 네가 사과를 해야 되겠어. 그래야 학숙이 조용해질 것
같애"

가서가 김영에게 눈짓까지 하며 사과를 종용하였다.

그러자 김영이 어깨숨을 한번 쉬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그럼 내가 사과할게"

김영이 진종 앞으로 오더니 꾸벅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아직도 건방진 구석이 남아 있었다.

"그 따위로 사과하는 법이 어디 있어. 머리를 땅에다 대고 절을 하란
말이야"

보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김영은 보옥이 자기 고모를 찾아가 고자질을 하겠다는 말에 은근히
겁을 먹고 있던 차라 보옥의 요구를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땅에다 대고 절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엉거주춤 서 있는데 가서가 다가와 김영에게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속담에, 사람을 죽여도 머리만 한번 숙이면 된다는 말이 있잖아.
이번 일은 네가 잘못한 점이 있으니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꾹 참고 절을
해줘버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그러면서 김영의 허리춤을 손등으로 쿡쿡 쥐어박았다.

에이, 더러워서. 가문이 좀 세다고 위세를 부려? 하긴 가문도 무시할
수가 없지. 진종이 녀석만 있다 해도 끝까지 버티겠지만 보옥 도령이
저러니 할 수 없지.

눈 딱 감고 절을 하는 수밖에. 언젠가 복수할 기회가 있겠지. 김영은
입을 악다물고 진종 앞으로 가서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