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저울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000~4000년경의 고대이집트 벽화나 파피루스에 오늘날의 천칭과
같은 저울의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3000~2000년경의 메소
포타미아나 인더스강 유역지방의 유적에서도 천평의 일부분이나 여기에
사용된 분동(천평으로 물건을 달때 한쪽 접시에 올려 놓아 감준을 삼는
금속제 추)이 발견되었다.

당시 이집트인들의 저울을 공정거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한편 인간이
죽은 다음 그가 생전에 착했는지 악했는지를 가늠하는 지랫대로도 사용된다고
생각했었다.

고대이집트인들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자 시체와 함께 묻었던 "사자의
서"에는 진실의 상징인 깃털 한개가 놓인 천평 접시의 반대편 접시에 죽은
사람의 심장을 놓았을때 두개의 접시가 균형을 이루면 착한 자로서 오시리스
신의 환영을 받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 사악한 사람의 심장을 먹어치우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에도 저울의 눈물을 속이는 부정행위를 내세에서도 죄값을 치르는
악행으로 보였던 것이다.

동양에서도 기원전 2000년경 황하유역의 한민족이 도랑행제도를 이미
실시한 것으로 미루어 볼때 그 훨씬 이전에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이 사용
되었음을알수 있다.

그때의 저울 또한 천평과 같은 것이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삼국초기부터 중국의
저울 그대로 들영와 썼었다.

길이나 부피의 단위는 달랐으나 관.근.냥등 무게의 단위만은 중국을
따랐다.

국가간의 무역에서 저울만큼은 같은 단위를 써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
이다.

그 제도는 통일신라와 고려,조선조에도 계승되었다.

조선조 세종때는 1근을 641.949g으로 하는등 무게의 기준을 표준화시킨데
이어 숙종과 철종때도 저울을 통일시키는 개혁이 있었다.

1905년 고종때는 일본의 제도를 본떠 1근을 600g으로 하는등 도랑형법이
제정 공포되었으나 왜저울이라 하여 배척을 당했다.

그러한 관행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채소를 사고 팔때 포기 다발 개수로 셈할
정도다.

술과 같은 액체마져도 저울로 다는 중국과는 대조적인 현상이 아닐수 없다.

요즘 음식점에 판매되는 쇠고기등심 1인분의 무게가 둘죽날쭉이라는 소비자
보호원의 조사 또한 과학적 상거래에서 일탈되어온 관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눈가울으로 상거래를 하는 한국인들의 심장이 저울접시에 올려 놓여져야
할 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