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 < 서울대 교수 >

여러가지 우여곡절끝에 북한에 쌀을 제공하기위한 남북간의 고위급회담이
타결되었다.

쌀을 제공받기 위한 북한의 접촉은 일본과 먼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정부는 남북관계개선의 중요성을 들어 남북간 합의를
일본의 북한에 대한 쌀제공의 선행조건으로 걸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우리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북한은 남북간 회담에 임했고 결국
남한은 15만t을 북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최근 콸라룸푸르에서 타결된 경수로회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한국은
경수로 노형의 선정과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놓고 벌어지는 미.북간의
협상과정에서 제3자적인 입장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쌀 회담의 경우는 남북간합의의 선행조건화 전략의 결과 한국의
입지가 한단계 격상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당국자간 회담의 성격을 강조하려는 남측과 비
당국자간 회담의 성격을 강조하려는 북측간의 신경전이 있었고 이점이 협상
결과 발표를 지연시킨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회담의 형식 문제는 앞으로 남북한 관계가 점진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한국정부는 남북간의 접촉방식이 공식적인 당국자 회담 방식이 되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남북기본합의서에 입각한 기존의 대화채널을 활성화하고 결국은
남북간 정상회담까지 실현해 현안문제들을 당사자 간에 풀어나가는 것이
우리 정부의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핵문제나 쌀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살펴볼수
있듯이 미국과 일본의 북한행 러시를 이용하여 대남 협상에 있어서 주도권을
취하고 이를 이용해서 적당한 선에서 실리와 함께 명분을 추구해 나가려할
것이다.

그러면서 가능하다면 최대한으로 남북간의 접촉을 비공식화하려고 노력할
것이 예상된다.

북한이 이렇게 남한 정부를 상대하지 않으려는데는 형식적으로는 김일성
사망시의 조문문제를 이유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북간의 접촉이 가져올 대내정치적 효과에 대한 우려
때문에 비공식적 방식을 선호하는 측면이 없지않다.

남북간의 경쟁에서 북한의 열위가 대내적으로 알려지는데에서 오는 정치적
불안요인, 그리고 남한과의 물적 인적 접촉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막아내는데
비공식적인 접촉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쌀의 북한으로의 유입과정에서 한국산이라는 것을 명기하는 것에 대한
북한의 이의 제기라든지, 선적지가 나진 선봉으로 결정된 것등이 북한측이
이점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경수로 부지선정의 문제라든지,여러가지 남북간의 현안문제를 놓고 우리가
북한과 협상해나가는데 있어서 한국정부는 이러한 점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너무 조급하게 남북접촉의 정치적 효과가 북한내부에 파급
되도록 의도하는 것은 피해야될 것이다.

그보다 오히려 우리측이 북한의 점진적인 개혁과정에서 겪게될지도 모르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데 진심으로 도움을 줄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북한은 남한보다는 미국 일본과의 교섭에 더욱 힘을 기울일
것이다.

북의 핵카드는 대내적 변화에 의한 체제붕괴에 대한 국제적 보장을 요구
하는 안전핀의 의미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지하고 일관된 대북협력의 의지는 북한이 기존의 대남
전략을 바꾸고 남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북한에
분명히 전달해야 된다.

실제로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 내부의 논쟁과 국론분열의 책임은 북한이
그들의 대남전략을 바꾸었다는 증거를 아직까지 보여주지 않았다는 데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통일후 만나본 구서독 사람들의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과거에 통일 그자체 보다는 동.서독간의 평화와
동독인들의 인권및 경제적 어려움을 돕기 위하여 노력했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통일은 통일에 앞서 우선 먼저 추구해야될 인간의 보편적 가치들
을 실현하기 위해 충실히 노력한 대가로 주어진 선물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