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 사이의 경수로 협상이 지난12일 콸라룸푸르에서 마침내
매듭지어졌다.

이로써 지난해 10월21일 제네바에서 성립된 "합의 틀"은 계속해서
유지될수 있게 됐으며 북.미 관계는 대화와 협력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설수 있게 됐다.

북한의 미국과의 관계만 새로운 발전적 국면을 맞게 된 것이 아니다.

경수로 협상은 북한에 제공되는 경수로가 사실상 한국형 경수로이며
또 북한에 경수로가 건설되는 모든 과정에서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것에 합의했기 때문에 자연히 북한의 남한과의 관계도 새로운
발전적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콸라룸푸르 합의내용 가운데 우려할 만한 요소가 없지는 않다.

이 합의는 북한의 성실과 신의를 전제한 것인데,만일 북한이 지난 날에
자주 그러했듯 자신의 약속을 뒤엎는다면 미국과 한국은 다시 한번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콸라룸푸르 합의는 긍정적인 부분들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다.

제네바 합의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콸라룸푸르 합의는 확실히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협력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할수 있는 첫번째 근거는 이번의 경수로 협상 과정에서
확인된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이다.

김정일은 지난해의 제네바 협상 때도 협상의 모든 과정에 대한 자신의
장악력을 보여주었고 그 이후의 대미 협상에서도 그러했는데 이번에도
그 점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이것은 북한이 김일성이 죽은 뒤에도 김정일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체제 운영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필자가 이미 여러차례 강조했듯이 북한의 급격한 정치변동은 한반도의
안정에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북한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야 북한은 비로소 개혁과 개방을 추진할수
있으며 북한이 자기 스스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할때 비로소 남북관계는
의미있는 접점을 마련할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 정권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정일의 1급
보좌관들이 지닌 개혁.개방 성향이다.

그들은 북한이 단계적으로 개혁과 개방의 길을 걸어야 북한 경제를
살릴수 있고 북한 체제를 유지할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볼때 콸라룸푸르 합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높아지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김정일의 보좌관들은 경수로 협상을 성공시켜야 북한이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아갈수 있다는 판단에서 "한국형"과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사실상 받아들인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이제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개혁과 개방을 향해
확실하게 운신할수 있게 됐다.

우선 협상 상대방인 미국이 북한에 대해 보다 더 폭넓게 경제적 지원을
베풀수 있게 됐으며,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단계적으로 추진할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시킬 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협력을 여러
방면에서 넓혀간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북한으로서는 엄청나게 큰
이익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그러한 행위들은 북한이 하나의 국가로서 붕괴하지
않고 존속할 것임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일본이 북한과의 수교협상을 빠르게 추진할 것이다.

이미 북한에 대한 쌀지원 문제를 놓고 두 나라는 깊이있는 협상에
들어섰는데,콸라룸푸르합의는 일본정부가 북한과의 수교를 향해
움직여가는데 좋은 촉진제가 될것이다.

한편 북한은 북한대로 일본과의 수교를 서두를수 있게됐다.

북한이 미국및 일본 모두와 가까운 장래에 수교를 성사시키게 될때
북한은 안정적으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할수 있게 된다.

남북관계의 개선도 반드시 뒤따르게 된다.

북한이 "한국형"과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사실상 받아들였다는 것은
남북대화를 예견하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해도 좋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은 결코 풀어질수 없다.

특히 제네바합의가 덮어놓은 북한의 과거핵에 대한 우리의 구명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흐름은 북한이 핵개발 대신에 개혁과 개방의 길을
선택한 것을 보여준다.

다행스런 일이다.

정부는 북한의 흐름,그리고 국제정치의 흐름을 정확히 읽으면서
신속하면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그리고 궁극적인
통일을 준비하기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