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의 해외사업이 꽤나 잘 풀린다 싶었다.

특히 현대 삼성 포철등 한국을 대표하는 "빅(Big)3"의 활약은 대단했다.

삼성전자가 미국 유수의 컴퓨터 업체인 AST사 경영권을 인수키로 했다는
올봄의 뉴스는 세계 전자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현대가 나섰다.

미오리건주에 13억달러짜리 세계 최대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해
또 한번 톱 뉴스를 만들어냈다.

포철은 뉴욕증시에 직상장을 추진하면서 세계 철강업계의 강자임을 만천하
에 떨쳤고..

빅3의 이런 뜀박질은 "세계화란 바로 이런거구나"하는 걸 실감케도 했다.

그러나 웬걸, 기세좋던 뜀박질에 곧 제동이 걸릴 모양이다.

기업들의 대규모 해외투자 사업에 일정 비율의 자기자본을 들고 나가도록
하는 방안을 정부가 검토중이라는게 최근의 보도(한국경제신문 9일자)다.

현대전자가 미TV콤사를 인수하기 위해 한국은행에 낸 해외기채 승인요청건
이 전면 보류됐다는 소식이고 보면 이같은 보도가 단순 검토단계에 있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같은 정책이 실제로 구체화돼 집행된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화의 기치아래 활발히 진행돼 온 기업들, 그중에서도 대기업의 해외
투자에 일단 제동이 걸릴 것은 불문가지다.

예컨대 이달말까지 AST 사 인수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삼성전자의 경우
자금조달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게 일선 기자들의 전언이다.

하필 현대나 삼성의 케이스라서 "대기업 편들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으되, 이건 사안 자체가 결코 개별 기업차원의 문제일 수 없다.

세계화를 앞서 주창한 관이 세계로 달려 나가는 기업의 뒷다리를 붙잡고
있는 형국이어서 그렇다.

과거의 예로 봐서 기업들의 뒷다리를 잡아도 결국엔 잘 되더라는게 관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또한 구식발상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지구촌에선 일년 열두달 매일같이 경제올림픽이 치러지고 있다.

경기장에는 도요타 GM 소니 GE 신일철같은 세계의 거인들이 버티고 서있다.

이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한국의 대표주자 빅3는 아직 초라하기 짝이
없다.

죽자 살자 뛰어도 이길까 말까한 상황에서 모래주머니(비싼 국내자금)를
차고 뛰라니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찰 노릇일게다.

빅3의 딜레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관이 이렇게 구태를 보이며 깔짝대고 있는데도 기업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게 우리네 현실이다.

행여 정부 정책에 이의를 달았다고 치자.

그랬다가는 형법에도 없는 "괘씸죄" 내지 "기업연좌제"에 걸려들기 십상
이다.

연초 최종현전경련회장이 정부 정책을 놓고 그의 소신을 피력했다가 고초를
겪은게 그 단적인 예다.

어디 그 뿐인가.

"공장하나 짓는데 도장이 1,000개나 필요하다"는 이건희삼성그룹회장의
북경발언 직후에(과연 그런지) 실사를 해보았더니 "1,000개까지는 아니고
600여개였다"는 과민반응이 청와대 직원들 입에서 흘러나오고, 사실여부를
떠나 삼성그룹과 청와대가 이내 편치 않은 관계에 들어갔다지 않은가.

이래저래 재계 사람들이 갖춰야 할 제일의 덕목은 "입조심"과 "눈치
살피기"가 돼 버렸다.

삼성전자가 내부검토해온 미반도체공장 건설프로젝트를 일단 덮어두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눈치작전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기업들이 눈치를 보면서라도 잘만 돼 간다면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정부가 쳐놓은 "규제 그물"에 이렇게 저렇게 걸려들고 골탕을 먹다보면
기업의욕이 무지러지고 경제는 기가 꺾이게 마련이다.

김영삼대통령이 "한국을 세계에서 기업하기에 가장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
는 의지를 강하게 비치고 있지만 그 밑의 관리들은 근착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시니컬한 지적마따나 "한국모델(규제행정)"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해외투자에 자기자본 조달을 의무화하자는 발상에도 나름의 논리는
있을 게다.

현지금융에만 의존할 경우 외채성 자금의 상환부담이 늘어 국가경제 내지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는 식으로.

그러나 세계화를 외치는 정부라면 바깥세상의 흐름을 올바로 읽고 더 크게
봐야 마땅하다.

기업을 보는 눈도 그래야 한다.

기업은 결코 "관의, 관에 의한, 관을 위한" 것일 수 없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민의, 민에 의한, 민을 위한" 존재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선 그렇게 자리매김돼야 한다.

민과 관, 기업이익과 국가이익은 상치되는게 아니다.

상생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아이젠하워 대통령시절 국방장관 찰스 윌슨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빅3"에 좋은 것은 한국에도 좋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