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기 <증권거래소 이사장>

냉전체제가 붕괴된 지금 세계 각국의 경쟁은 오직 시장경제의 원리만이
작용하는 시대가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각국 노동시장의 수급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자리보다 일꾼이 남아도는 사회가 되었고 그러면서도 산업공동화는
일자리를 더욱 급격히 줄어들게 하고있다.

산업 공동화는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나타난다.

경제의 국제화와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흐름은 각종 "코스트 푸시"요인이
많은 나라의 기업으로 하여금 최적의 경영환경을 제공하는 곳을 찾게
하여 기업의 규모에 상관없이 거침없는 자국탈출을 시도케한다.

뿐만 아니라 불안정하게 급변하는 국제외환시장의 동향도 기업들에는
해외이전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고있다.

이와같은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은 곧바로 국내실업의 증가로 이어져
경제운영의 기본목표인 고용안정의 유지를 불안케하고 결국은 국내
총생산의 저하를 가져온다.

최근들어 산업공동화의 폐해가 가장 심각한 곳은 아무래도 일본인것
같다.

일본 제조업생산의 13%,전산업근로자의 11%,수출비중의 14%를 차지하는
전략산업인 자동차산업을 예로 보자.우선 자동차산업에 관한한 미국과
일본의 공동화의 과정은 역사적으로 정반대의 궤적을 그리는 관계에
있다고 할수 있겠다.

83년 일본제 자동차가 미대륙에 본격 상륙하기 시작하면서 디트로이트에
있는 전미 자동차노조(UAW)본부의 정문에는 이런 구호가 걸렸었다.

"실업은 메이드 인 재팬의 탓" "도요타 닷슨 혼다 그리고 진주만"

당시 디트로이트에서는 자동차관련 부문에서만 50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하였고 그해의 일제 수입자동차는 총 190만대로 미국에서 팔리는
차중 4대당 1대가 일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일부 실업자들은 실업이 일제차 때문이 아니라 포드
GM 크라이슬러등 미국의 3대메이커인 소위 "빅3"의 경영자가 낮은
생산성등을 이유로 설비투자를 서둘러 해외로 이전한 탓(산업 공동화)
이라고 비난하였다.

10여년후인 93년,일본의 3대자동차 메이커의 하나인 닛산은 연산
26만대규모의 자마공장을 2년후에 폐쇄한다고 발표하면서 전사적으로
5만3,000여명의 종업원중 9,000여명을 감축한다고 공표하였다.

자마공장의 폐쇄가 일본인들에게 더욱 큰 충격을 준것은 종신고용제
연공서열제 노사의 신뢰와 상호희생이라는 바탕위에 정착한 산업평화라는
일본산업의 덕목이 일순간에 붕괴되는데에 대한 절망이었다.

어쨌거나 93년말현재 전일본의 연간 자동차생산능력은 1,450만대
수준이나 실제 생산은 1,150만대에 머물러 300만대정도의 설비과잉이
되고 말았다.

초엔고에의 대응과 군살빼기 "리스트럭처링"차원에서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국내생산라인의 감축과 동시에 미국 영국 스페인 태국등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결과로 인해 지금 일본의 실업률은 사상
최고의 수준이다.

과연 실업과 해고를 낳는 산업공동화에 대한 공포가 확산될만한 상황이
되었다.

반면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암울했던 디트로이트에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장기간의 불황속에서도 끊임없는 "리스트럭처링"의 철저화에 의한
"코스트다운",일본식 QC운동에 의한 품질향상과 생산과정의 합리화로
92년부터 생산과 판매대수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

화이트 칼라 조직의 생산성제고노력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일반근로자
(블루 칼라)도 팀의 일원으로서 "파트너십"이 강조되는 "퀄리티.
네트워크"라는 품질향상을 위한 노사협조체제는 지금 3교대 24시간
가동체제에 돌입하고 있다.

클라이슬러는 플랫폼방식을 채택,각라인의 대표자가 항상 협조하는
체제를 갖춘 결과 일제 어코드( Accord )보다 2,000달러나 싼 네온
(Neon)을 내 놓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이 과거 미국이 자기들의 경영방식을 배워갔다고
뿌듯한 자부심에 젖어 있을때 미국은 오히려 이를 한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린 결과라 하겠다.

확실히 이제 미국은 과거의 산업공동화에서 산업평화로의 이행이
가능한 경지에 이른 것 같다.

GM사 임원과 노조원들의 명함에는 한가운데에 "퀄리티.네트워크" 문자,
좌측에 UAW의 로고,그리고 우측에 GM마크가 찍혀 있으며 모두가
퀄리티.네트워크"슬로건표시를 항시 패용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변화는 과거 제몫찾기에 투쟁일변도였던 GM 노조원
사이에 이제는 "GM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는 인식이 강하게 심어져
있다는 점이다.

우리 기업들도 그동안 급격한 인건비 상승과 무역장벽 회피를 위해
동남아 등지에 해외공장 설립과 해외의 저임금 근로자 수입을 적지
않게 추진해 왔다.

이역시 공동화의 우려를 낳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두번째의 엔고 호기를 맞이하여 산업구조 조정노력,기술개발투자,
지나친 대일 의존도 탈피등 경쟁력 회복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사의 상호신뢰에 바탕을 둔
산업평화의 정착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다른 모든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공동화 우려 측면에서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보이고
있는 미.일 자동차산업의 오늘날의 공동화 실상은 우리 국내기업의
노사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이유야 어쨌든 산업기지의 해외이전은 우리의 일자리를 줄게 하고
일자리가 줄어들면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간단한 진리를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하겠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