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을 보면 아무 걱정이 없는데,하나 있는 아들 녀석을 보면 여간
걱정이 아니란다"

갑자기 왕부인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아들이시라면?"

대옥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보옥이라고 우리집 혼세마왕이지. 혼세마왕 알지? 옛날 소설에 나오는
귀신 이름 말이야"

대옥은 어떻게 어머니 되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가리켜 혼세마왕이라고
하는지 얼떨떨해졌지만, 그냥 말썽꾸러기라는 뜻으로 말했을 것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요?"

대옥은 슬쩍 말을 돌려보았다.

"무섭게 생겨서 그러는게 아니라 아주 변덕스러워서 그런단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께서 금이야 옥이야 하며 너무 애지중지하는 바람에
그만 응석받이로 자라고 말았단다.

어떤 때는 혼자 좋아 날뛰다가도 어느새 풀이 죽어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기도 하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아니란다.

그러니 내가 걱정이 되지 않겠니? 그 애가 너에게도 행패를 부려
마음 아프게 하면 어쩌나 벌써부터 염려가 되는구나"

왕부인이 대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정말 염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로는 보옥 오빠가 사내아이들은
싫어해도 누나나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는 친절하다고 그러던데요"

대옥은 보옥이 자기에게 행패를 부리기보다 오히려 다정하게 대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그렇게 염려하실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보통때는 그렇지. 그런데 계집아이들이 자기를 조금만 서운하게
대한다든지 하면 울고불고 야단이란 말이야. 그러다가도 계집아이들이
칭찬을 해주고 좋은 말을 해주면 금방 마음이 풀려 헤헤거린단 말이야.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그애를 가까이 하지 않는 거야. 알았지?"

"네.알겠습니다. 저는 언니들과 함께 있고 보옥 오빠는 다른 채에
계실 테니까 만날 일도 별로 없겠지요"

왕부인은 대옥이 영리하게 말을 하는 것이 대견스러워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렇지. 내 말은 간혹 만나게 될 때에 조심하라는 거지. 지금
보옥이 사당에 가 있지만 저녁 때쯤 돌아와서 나에게 인사를 오면
너도 만나게 되겠지. 만나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더욱 알게 될
꺼야"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