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태 < 산업연구원 부원장 >

20세기의 종말과 21세기의 시작을 앞둔 오늘날의 지구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세계화 분권화 자율화이다.

국민국가의 주권이 국제역학적 도전에 직면하고 정부의 규제는 시장이윤
동기앞에서 와해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주권을 가름할수 있는 세계정부 내지는 세계규범은
아직도 요원하고 정부의 고삐에서 풀려난 경쟁만능주의가 인류에 풍요와
평화를 가져다 줄지 또는 갈등과 대립을 가져다 줄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확신을 가질수가 없다.

한가지 엄연한 현실은 세계화현상을 주도하는 세력은 미국이 중심이 되는
경제대국이고 그 속에서도 특히 초국적기업 또는 무국적기업으로 불리는
거대기업군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이제 세계 유일의 군사대국으로 남게 되었고 경제력에 있어서도
비록 삼각체제라고는 하나 일본과 EU와는 동열이 아닌 우월적인 지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과 그 산물인 WTO체제는 미국이 독주하고 EU와 일본이
견제하며 후발국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자유무역질서가 모든 국가들에 호혜적인 이익을 창출한다는 대의명분은
누구도 반대할수 없으나 무한경쟁의 냉엄한 현실앞에서 대의명분만 가지고
무조건 선진국의 강자논리를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다.

국제무역규범에 지고지선은 없다.

국제무역규범은 옳고 그름의 윤리적 잣대로 잴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국가가 더욱 많은 이익을 향유하느냐의 이해타산적 계산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해타산을 계산할때에는 개별적 단기적 이해와 전체적 장기적 이해가
구별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애매모호한 전체적 장기적 이해를
앞세우고 확연하게 드러나는 개별적 단기적 이해는 덮어두는 경향이 강하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하여 더욱 많은 상품을 사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국제수지가 심각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경우에 국한되어야 한다.

한국이 미국에 대해서 만성적인 적자를 내고 있으면 오히려 우리가 미국의
불공정한 무역제도와 관행을 문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식품의 유통기한을 기업자율에 맡기는 것은 공정하고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검증되기 어렵다.

식품의 유통질서는 그나라 소비자들의 의식수준, 정보획득의 용이성,
소비자감시기능, 업계의 기업윤리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미국에서 불량식품을 판매하면 소비자단체의 거센 반발때문에 기업이 도산
할수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불량식품의 판매로 오히려 큰 돈을 벌수 있지
않은가.

세계화에 부응하는 통상정책은 교역상대국과 우리국민에 대하여 떳떳하고
의연한 자세를 견지할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갈수 있다.

강대국의 압력에 맞서 보았자 우리만 손해를 본다는 약소국의 지나친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장기적 이해와 단기적 이해를 분명히 하고 무엇이
국익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여 일관성있는 기조를 견지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민앞에 떳떳해야 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지킬수도 없는 약속을 한다거나 감당할수 없는 사안에 대하여 버티는
척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듣기 좋은 구호만 늘어 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율 규제완화 작은정부 세계일류 정보화등이 유행어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해야만 할일을 꼼꼼히 챙기는 것이 소홀히 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 보아야할 때이다.

작은정부가 중요하지만 정부가 꼭 해야할일은 항상 있다.

선진국이 빨리 되기 위해서 해야할일 중의 하나는 우리의 산업을 내실있게
키우는 일이다.

우리사회에는 언제부터인지 정부가 산업을 지원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고 WTO체제도 이해 못하는 즉 세계화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비하하는 이상한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이와같은 지적 혼돈의 와중에서 금번에 정부가 자본재산업육성책을 발표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신선한 충격이다.

자본재산업 없이는 선진국으로 진입할수 없음은 OECD회원국가들의 산업
구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의 취약한 기술, 열악한 금융조건, 부족한 인력, 협소한 시장등의
불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와 실효성있는 지원책이
필요함은 금방 알수 있는데도 정부가 이를 방치해 온 것은 민간자율과
개방 경쟁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정도 수준으로 발전할수 있었던 것은 선진국정부가 자국이익을
위하여 주창하는 정책을 순진하게 모방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고민과
의지가 실린 개발전략을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강대국이 주도하는
국제경제질서 뒤에 숨어 있는 냉혹한 자국이익 추구의 실상을 직시하고
우리 스스로의 살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것은 남이 만들어 놓은 규범을 피동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조금이나마 우리의 의지를 관찰할때에만 국가
발전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