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원 < 전 주중 대사 >

한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아직 죽지도 않는데 그의 죽음이후의 일을
논한다는 것은 그렇게 온당한일이 못된다.

그러나 금년초부터 등소평의 죽음이 임박하다는 소문의 끈질기게 나돌고
있으며, 더욱이 등소평사후에 대비한 권력투쟁이 이미 시작된것을 시사하는
언론보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있다.

등소평이후의 중국과 한반도관계에 대한 나의 관찰을 소개하는것도 약간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949년에 건국한 중국은 모택동의 시대와 등소평의 시대로 구분할수 있다.

27년간의 모택동시대는 공산정권의 기반확립과 체제구축을 위한 투쟁의
시대였으며 많은 시행착오(대약진,문화혁명)를 겪는 과정에서 약 4,000만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등소평은 1978년에 집권한이후 18년이 흐르는 동안 인민공사를 철폐한것을
비롯하여 과감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12억의 중국대중의 식생활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은 등소평의 절대적인 지도력에 의한 성과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을것이다.

중국대중을 기아선상에서 구출하고 중국은 세계경제에서 무시할수 없는
경제대국의 자리로 약진시킨 그는 반면 많은 문제가운데 일부만 지적한다면,
우선 제조업의 성장에 보조를 맞추어 유통 에너지 교통 통신등의 성장을
이룩하는 문제를 들수있다.

경제운용에서 지방분권화가 심하해 나가는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조정능력과
위기관의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가 큰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밖에도 광범위한 부정부패문제 배금(금)주의에 사로잡힌 민중의 생활
의식이 공산주의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초래하는 사회문제와 정치적영향도
무시할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등소평이후의 중국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최근 몇건의 부정부패사건이 적발되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권력투쟁의 개막
으로 보는 보도가 나돌고있는데" 그러한 관측을 부인할만한 충분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부정부채척결은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사업인데
등소평 사후에 적발하면 등소평파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등소평 생존중에 시작함으로써 그것이 등소평의 의지에 의해 시작된 것처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여 등소평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등소평의 측근부터 부패
척결을 시작, 광범위한 부정부패추방사업은 강력히 추진하는 정당성을 얻으려
하는 정치적 판단에서 강력히 비롯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투장이 있다면 강택민을 중심으로 한 상해그룹의 집권투쟁에만 관측의
초점을 맞출것이 아니라 "천안문사건"의 재평가를 통한 조자양의 복귀 가능성
또는 양상곤의 재등장 가능성, 그리고 군부의 향배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등소평이후에는 등소평과 같은 한사람의 최고지도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강택민을 중심으로한 공산당 정치국 상임위원들의 집단
통치체제로 돌아가 상호견제의 정치적 역학관계속에서 정책결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97년 10월의 공산당15기 전당대회시까지 갈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외교정책 기조는 크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붕괴로 러시아의 군사및 정치적 마찰을 해소했으며 개혁과 개방의
경제정책의 성공으로 대외무역규모가 GNP의 36%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대외의존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태에서 중국이 경제성장의 지속을
위해 거대한 자본, 기술및 수출시장으로 볼 수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국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지 않을수 없게돼있다.

근년에 와서 중국지도자들의 외국방문이 과거의 제3세계 위주에서 서방
각국에 집중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하다.

같은 의미에서 중국은 주변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이 국가이익을 경제성장의 연장선상에서 추구하는한, 등소평이후에도
외교정책의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의 한반도 정책의 기본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한본도의 평화와 안정이다.

평화는 한반도에서 6.25와같은 전쟁이 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안정은
남북한에 두개의 정권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서로가 안정된 관계를
가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1992년에 중국이 대한민국과 수교를 하게된 정치적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다음 중요한 정책은 한반도의 비핵화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중국은 누차에 걸처서 분명한 입장을 천명해 왔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지금단계에서는 경고성 입장천명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것이 분명해지면 중국의
태도와 행동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중국의 심장부인 북경과 북한이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어 안보와 정치적
국익이 중대한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극적으로 고조될때, 평화와 안정을 전제로한 중국의
경제성장 추진 전략은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는 그나마도 혈맹적 정서를 유지하고 있었던 김일성과
등소평이 사라진 이후에는 양국의 새로운 지도층들이 의리보다 냉정한 타산
위에서 서로를 처다볼것이며, 정상적인 국가대 국가의 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지정학적 이유때문에 중국은 북한의 붕괴나 소멸을 원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중국은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동시에 중국은 지리경제학적 이유에서 대한민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이것은 등거리 외교도 아니고 중립 정책도 아니며, 각각 다른 동기에서
남북한과 우호, 친선및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형태가 될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