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디를 가나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의 북경발언이 화제에 오른다.

"속시원하게 잘해줬다"고 하는가 하면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이라는
풀이도 있고 "정부를 겨냥한 발언인데 서울서 할 노릇이지 어째서 북경까지
가서 시끄럽게 했느냐"며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리 타국에서
기자들과의 식탁대화중에 우연찮게 튀어나온 말에다 큰 의미를 둘것까지는
없지않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축소하혀는 사람도 있다.

그 정도의 이야기는 일반사람들간에 흔히 오가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기업그룹의 총수쯤 되면 무슨 불이익이 있을까 두려워서 좀처럼
입밖에 내지못하던 말이다.

이를 삼성회장이 느닷없이 던졌으니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거리가 될수밖에
없다.

이번 발언의 핵심은 한마디로 "정부의 규제가 너무 많아서 기업을
못하겠다"는 것으로 간추려진다.

정부측도 이 발언의 충격적 파문을 한때의 해프닝으로 여기려 들지 말고
앞으로 다시는 그러한 발언이 나오지 않도록 행정규제를 줄이는데 힘써야
하겠다.

지금 우리경제는 엔고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이때를 놓치지말고 후발 개도국들이 쫓아오려면 긴 세월이 걸릴 하이테크
산업을 서둘러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초과학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으나 우선 손쉬운 것부터
손대려면 지금 엔고때문에 생산기지를 외국으로 옮기고자 애쓰고 있는
일본의 하이테크산업을 유치하는 것이라는데 이견이 있을수 없다.

일본의 요구조건은 행정규제완화와 함께 생산성에 걸맞는 임금체제등 기업
할수 있는 환경조성이므로 행정규제 완화에 대한 알맹이 있는 결단이 하루
바삐 내려져야만 할때다.

물론 정부가 규제완화에 인색하게된 그럴만한 이유가 없지는 않다.

중소기업의 보호가 그 대표적 이유다.

그러나 중소기업보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반도체공장을 하나 짓는데도
1,000개이상의 도장을 받아야만 한다면 중소기업보호란 한낱 규제를 위한
구실밖에 안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물론 돈벌이가 잘되는 업종이라면 무엇이건 약육강식으로 덮치는 문어발식
확장행태에 굴레를 씌우려는 것까지 풀어야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발족하면서 4,000여개의 규제를 풀겠다고 해놓고 실제
푼것은 700여건밖에 안된다고 하니 이런 상황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이야
"전과 다른것이 하나도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을수밖에 없다.

정부가 중소기업보호와는 한참 거리가 먼 인.허가권을 계속 움켜쥔채
챙기려고만 하니까 그러한 넋두리를 듣게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회장은 "자동차공장이 마지막"이라고 했고 삼성은 중국에다 2000년까지
8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려는 추세를 살펴보면 현재는 손이 많이가는
산업들을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규제를 푸는데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기술집약산업까지
밖으로 나가려할 것이고 그렇게되면 일본의 하이테크산업유치등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규제를 풀어야만 한다는것은 코앞에 닥친 과제다.

우선 대기업들의 횡포를 막기위한 규제만 남기고 다른 규제들은 다
풀어야만 한다.

중소기업보호와 아무 상관없는 사항도 중소기업보호라는 미명으로 포장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시장원리에 따른 우승열패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올해 발족된 WTO때문에 경제적 국경이 무너져 내리고 이에따라
무한경쟁의 강도가 더욱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환경은 대기업들도
살아남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중소기업보호를 위해 대기업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규제
한다면 이나라 기업들은 외국기업들에 다 먹히고 말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기우로만 돌릴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중소기업의 위치를 대기업과의 대결이나 경쟁상태로 내몰지말고 협력관계로
이끌어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중소기업 부도율이 최근들어 0.04%에서 0.18%까지 늘었다는 수치는 중소
기업의 어려움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규제를 푼 결과 중소기업 도산으로 이어지지않게 하기위한 관계당국과
대기업간의 보다 긴밀한 협의와 협력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수 없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규제를 푼다고 소리만 요란했지 달라진게 없다"는 넋두리가 나온 것도
이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회장의 북경발언이 단발성 해프닝으로만 여겨져서는 안될 것이며 그
발언때문에 기업경영에 불이익이 초래돼서도 안된다.

이번 일이 오히려 규제를 효과적으로 푸는 긍정적인 전기가 되도록 관계
당국이 지혜를 발휘해야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