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이 넉넉지 못한 살림이지만 우촌을 위해서는 제법 푸짐한 술상을
차린 편이었다.

하인들이 연신 향기로운 술과 맛있는 안주를 내어와 우촌과 사은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마음껏 취하였다.

처음에는 마주 보고 떨어져 앉았던 두 사람이 어느새 어깨동무까지
해가며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기도 하였다.

하긴 그날 밤은 집집마다 피리소리,거문고소리,노래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와 온 거리가 흥청망청 들뜬 분위기였다.

밤하늘의 보름달마저 지상의 흥겨움을 따라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우촌이 서재의 창문 너머로 보름달을 바라보며 술잔을 높이 들어 또
시 한수를 읊었다.

그 시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사은이 높이 치켜든 우촌의 잔에 철철
넘치도록 술을 따라주면서 외쳤다.

"오, 빼어난 시로고.

방금 우촌형이 읊은 시만 보더라도 우촌형은 여기 항간에 오래 묻혀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지.

우촌형은그 자가 뜻하는 바대로 언젠가는 훨훨 날아오르고야 말 걸세.

불원간 영달의 길이 열릴 거란 말일세.

자, 그럼 우리 우촌형의 출세를 축하하는 뜻에서."

사은이 먼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촌도 엉겁결에 사은과 같은 동작을 취하다 말고 사은에게 따져
물었다.

"진선생은 남의 출세와 영달은 축하하면서 왜 자신은 그 길로 가지
않소? 저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계시면서 말입니다"

"허허, 이보게. 내 나이 조금 있으면 오십이오. 과거시험을 보기에도
이제 난 늦었소.

그리고 무엇보다 난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소.

그래서 꽃이나 대나무를 키우며 내 분수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 거요.

그러나 우촌형은 나이가 좀 들었어도 능히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소. 낙망치 말고 자신있게 나아가시오"

사은은 우촌을 격려하는 뜻에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기까지 하였다.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외람되오나 사실 저는 과거시험이라면 그 어느 시험이라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글이나 대필해주고 있는 주제에 장안까지 갈 여비를
마련할 길이 막연합니다"

우촌이 술잔을 힘없이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사은이 우촌의 말을 막을 듯이 한 손을 치켜들어 흔들었다.

"드디어 술에 취하니까 딱한 사정을 털어놓는구려. 진작에 그러실
일이지"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