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와 인간을 한 몸으로" 가전제품이 변하고 있다.

변화의 지향점은 "인간화"다.

사람이 기계에서 느끼는 차가운 이질감을 없애자는 것.

또 때로는 친구와 얘기하는 듯이 대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도 요즘
신제품의 흐름중 하나다.

"인간과 기계와의 교감(Man and Human Interface)".

이것이 가전 제품의 새로운 기술개발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이같은 동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말하는 가전제품"이다.

LG전자가 최근 내놓은 전자레인지는 사용방법을 일일이 말로 설명해준다.

예컨대 데우기 단추를 누르면 "데우기 입니다. 음식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시간을 선택하세요"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 경우 전자레인지는 더이상 차가운 쇠덩어리가 아니다.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다정한 안내자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미 구기술이다.

기계의 인간화는 단순히 입력된 음성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대화형"제품이다.

사람과 서로 이야기하듯 의사를 주고받으며 작동하는 것.

가전제품이 대화형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TV와 VTR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예약녹화등 큰 줄거리를 주문하면 VTR이 날짜와 시간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해당 사항을 입력하면 VTR은 다시 채널번호를 요구하는 식이다.

사람과 완벽한 대화를 하는 셈이다.

인간지향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기능적인 측면만이 아니다.

디자인이나 색채도 마찬가지다.

최근 가전 업체들이 흰색 TV를 내놓는등 색채파괴에 나서고 있는 것이
대표적 예다.

소비자가 취향에 맞는 색을 선택하도록 해 친근감을 유도하자는 생각이다.

냉장고의 냉장실이 위쪽에 설치되는 것도 디자인 측면에서의 인간지향적인
변화다.

냉장실의 사용빈도가 제일 많다는 점을 감안해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도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것.

빨래를 쉽게 넣거나 꺼낼 수 있도록 세탁기 높이를 주부들의 평균키에
맞추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같은 전자제품의 인간지향적 변화는 에르고노믹스(Ergonomics)라는 이론
으로 정립돼 있다.

노동을 의미하는 희랍어 에르그(erg)와 경제학을 뜻하는 영어의 이코노믹스
(economics)의 합성어인 이 말의 원래 뜻은 인간공학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기능 디자인 색채등 제품의 모든 것이 "인간을 지향한다"
는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국내업체들도 최근 에르고노믹스를 적용한 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인간지향적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커뮤니카토피아 연구소
를 설립했다.

이곳에는 19명의 연구원들이 있다.

연구분야는 사회학 문화인류학 심리학등 주로 인문과학및 사회과학 쪽이다.

사회와 인간의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겠다는 취지다.

"사람이 기계를 추종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기계가 사람에 맞춰야
하는 때입니다"(LG전자 커뮤니카토피아연구소 김재갑선임연구원).

삼성전자의 디자인실도 마찬가지다.

1백50명의 연구원들이 각자 색채 촉감등 전문분야를 갖고 있다.

전공만해도 40가지가 넘는다.

이들의 공통적인 과제는 기계와 인간을 친밀하게 만들 수 있느냐다.

여기서 하는 일은 "블랙박스 열기"로 불린다.

"블랙박스란 조작방법도 쉽게 알 수 없고 그래서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해
언제나 이질감을 느꼈던 전자제품을 말합니다. 이것을 누구나 쉽게 친근감을
갖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요"(삼성전자 디자인실 채충석과장).

사람과 기계사이에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 디자인실에서 하는 일이란
설명이다.

사람과 기계의 일체화는 물론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전자제품의 인간지향적 변화만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VOD(정보주문형비디오)등 대화형 서비스가 본격 상용화될 경우 그 강도는
더해질 것"(LG전자 김선임연구원)이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것을 부추기는 데는 좀더 편리한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큰
역할 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