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40대 K모 교수의 부친살해사건으로 전 국민이 충격에 잠겨 있을
때였다.

당시 어른들이 이 사건을 두고 "그 나이의 교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
를 죽일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전 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대화에 끼어든 한 젊은이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죽인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요"라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젊은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이해할수가 없다.

남의 강아지를 죽이면 시끄러운 문제로 번지겠지만 우리 강아지를 죽이면
이웃과의 책임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말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발언이 자연스러운것이라는데 젊은 세대들의 공통된 의식
구조가 깔려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속에는 죽음과 마찬가지로 살인에도 선택이 있는 것같은 잠재의식이
자리잡고 있을지 모른다.

살인은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는데 가족이나 부친에 대한 선택은 경우에
따라서는 수용될 수도 있다는 뜻인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믿고 따르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나 인간목적관
같은 인간본연의 성스러운 의무는 저버린지 오래라는 뜻인가.

만일 우리들 모두가 생명에 대한 경건심이나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배제
한다면 삶 자체와 사회나 역사의 존립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왔다.

또 그런 정신때문에 인생의 기반이 존속되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 주변의 젊은 세대들이 인간을 수단화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생명도 이용할수 있다는 가치관으로 바뀌어 버린다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자는 것일까.

확실히 최근 일련의 패륜적인 사건들은 인간과 생명이 목적이 아니라 황금
과 그 소비에 따른 향락이 목적이 되어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소유가 아니라 소유를 위한 인간의 위치로 전도되고 만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완전범죄만 보장될 수 있다면 패륜적인 살인은 더 쉽게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또 한가지 두려운 사실은 젊은 세대들은 부모나 선인들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같은 것은 염두에 없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동무"를 이데올로기를 위해 고발해 추방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용납될 수 없는 범죄집단임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잘못된 경제만능주의 가치관은 부모의 생명이나 인격보다는 소유와
재산이 더 높게 평가받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떤 사회와 어느 역사에서든지 인간의 가치보다 이념이나 황금을 앞세우는
세태가 된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의 종말을 초래할수 밖에 도리가 없다.

어느 부모든지 부모는 인간으로서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고 자식 앞에서는
베푼 은혜와 사랑의 대가를 인정받을 권위를 갖추고 있다.

이제 이 모두를 저버리고 모든 인간과 부모들까지도 돈과 향락의 값으로
대신할수 있다는 세대들과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어른들의 무책임과 젊은
세대들의 자멸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두세건의 패륜적 사건보다도 그것이 가능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구조의 만연인 것이다.

그런 가치관이 보편화된다면 그 정신적 질환을 치유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는 파국과 종말을 면치 못할 것은 자명하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이번 사건을 모두의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