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는 모두 평등한 주권국가이므로 다른 나라의 간섭을 "내정간섭"
이라고 배재한다.

따라서 한 나라의 영토안에서 발생한 범죄는 자국민이든 타국민이든
원칙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한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한미행정협정을 개정하라는 여론이 있는 것도 미군인
이나 군속의 재판권이 우리정부에 없기 때문이다.

또 재판권은 국내적으로도 독립되어 있다.

재판이 행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법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물론 "사법권의 독립"이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 재판의 결과가 반드시
"실체적 진실"에 부합된다고는 말할수 없다.

영국에는 "재판관은 똑같은 귀를 둘 가져야 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 말은
"귀가 하나인 재판관도 있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나 민족마다 법문화가 다르기때문에 최근처럼 국가간의 인적
교류가 빈번한 국제사회에서는 재판이 국제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특히 근래 아시아 4마리 용중의 하나인 싱가포르가 국제적인 사법분쟁의
당사자로 등장하고 있어 관심을 끝다.

작년 5월에는 미국소년 마이클 페이가 남의 승용차를 페인트로 더럽혔다는
이유로 싱가포르정부로부터 6대의 곤장을 맞기로 되어 있었으나 거듭되는
미국클린튼대통령의 요청으로 형량을 4대로 특별 감형시켰으나 태형때문에
말썽이 일었었다.

또 10월에는 미국인 크리스토퍼 링글(46)교수가 싱가포르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여 법정모독과 중상혐의로 싱가포르경찰의 조사를 받은
뒤 대학에 사표를 냈고 프랑스인 마르셀앰 포셰(45)는 불법체류 죄목으로
곤장 5대와 지역 8개월을 선고 받았다.

지난 26일에는 살인혐으로 싱가포르에서 처형된 필리핀 출신 가정부 플로르
콘템플라시온의 장례식에서 수만명의 필리핀군중이 반정부 시위대로 돌변
하였고 필리판 수도 마닐라에서는 외무부와 싱가포르항공 건물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테러가 감행되었다.

이에 앞서 라모스필리핀대통령은 사형집행의 부당성을 밝혀질 경우
싱가포르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고 까지 말하였다.

같은 아세안의 회원국인데도 국민정서란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쟁점은 집주인이 가정부를 죽였다고 증언하는 2명의 증인을 확보하였는데도
싱가포르법원이 재심을 허가하지 않은데 있다.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하지만 아직은 국민국가의 시대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