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세기가 재현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악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좋은 시절이 이미 도래하였다. 할렐루야"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한 익명의 시인은 사악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천년왕국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노래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폭력에 의해 구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정말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으로 혁명의 실패와 좌절을 지켜본
그들에게 혁명은 신의 약속을 토대로 세우진 "희망의 실현"이 아니라
"희망의 좌절"이었을 뿐이다.

19,20세기에 들어오면 기독교와는 아무 관련없이 천년왕국의 속성만을
그대로 모방한 세속적 청년왕국주의가 세계를 휩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버트 오웬의 유토피안 사회주의 운동,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운동,히틀러의 나치운동이다.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생각하며 "새로운사회"를 예언했던 이들의 꿈은
모두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종교적 천년왕국이란 신약성서 "요한계시록"20장에
나오는 개념을 확대해석해 그리스도가 재림하면서 지상에 세워 1,000년
동안 통치할 신의 왕국을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기독교의 구원관도 바뀌어서 모든 현세의 문제로부터
자아의 해방과 개인영혼의 축복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치닫는 터에
천년왕국이란 구원관이 신자들에게 어느정도 설득력을 갖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이제 종교적 의미의 천년왕국주의는 찾아보기조차 힘든다.

스스로 종교적 천년왕국주의를 주장하는 집단이 있다고 해도 그 집단은
이미 종교의 탈을 쓴 세속적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일본에서 일어난 독가스사건으로 물의를 빚고있는 "오움진리교"도
세속적 천년왕국주의를 꿈꾸고 있는 집단이다.

이들은 1997~2003년을 인류가 멸망하는 종말의 시기로 잡아놓고 구원받는
방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던 영생교 다미선교회등의 뒤를이어
최근에는 또 오는 4월16일 "부활절"을 "종말의날"로 공언하는 교회가
등장했고 그밖에도 10여개나 되는 교회가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고
있다는 소식이다.

위험한 집단광기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역사가 종말을 향해 가고있고 그것은 결국 역사의 완성을 이루는
새시대를 향해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을 종말론적 목적사관에서 구원할
종교다운 종교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