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간 통상현안인 미전신전화회사(AT&T)의 신형 전화교환기문제가 최근
워싱턴에서 있은 양국간 실무협의에서 타결됐다.

대미 협상에서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정부는 양보심을 발휘해서 미국
업체에 특혜를 베풀었다.

정부는 지금까지 "신형 통신장비에 대한 모든 품질인증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AT&T에 대해서는 이 인증절차를 간소화함으로써 종전 입장
에서 한발 크게 물러선 것이다.

신형 통신장비에 대해 품질인증을 받으려면 보통 1년정도의 검사기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유독 AT&T에 대해서만 오는 6월까지 기능테스트만 거치면
금년 하반기부터 한국통신의 구매입찰에 참여할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정부스스로 정부조달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미국의 특정업체를 위해
불공정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신형 장비의 품질인증은 외국산 수입식품의 유해여부를 가리기 위한 검역
절차에 비유된다.

이 때문에 한국통신의 조달규정에도 철저한 인증절차를 명시해 놓고 있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에는 이 절차를 철저히 적용시켜온 정부가 AT&T에 대해서
만은 그 대부분을 생략해 주기로 한 것이다.

일단 통신시장에 대해 물꼬가 트인 이상 미국제품의 우리나라 상륙에는
앞으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우리업체의 기술수준이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이므로 제2,제3의
AT&T가 밀려오면 국내 통신시장은 선진국 업체들간의 각축장이 될 공산이
짙다.

AT&T의 신형 교환기는 호환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T&T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현재의 유선 전화교환기 시장이 아니라
3조원에 이를 디지털 이동전화용 교환기시장이라는 얘기는 그래서 매우
설득력이 높다.

이 경우 디지털 교환장비의 국산화를 추진중인 국내업체가 어느정도의
피해를 입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통신기기는 국가의 기간 시설이다.

통신 시스템은 한번 설치하면 변경하기가 어렵다.

또 기존장비와 호환이 가능해야 하므로 국가의 형식승인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점에서 이번 통신협상 결과는 정부가 우리의 통신주권을 위태롭게
하는 선까지 양보했다는 뒷 얘기를 들을 만하다.

대미 통상외교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거의 시종 양보로 일관해 왔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를 양보하면 미국은 들을 또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번 통신협상에서도 미국측은 AT&T 문제가 타결되자마자 10가지가 넘는
또 다른 통신장비의 형식승인 면제를 요구하는 식의 상식밖의 주문을 하고
있다.

미국의 자성과 더불어 우리정부의 줏대있는 협상전략이 아쉽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