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시녀들은 귀공자와는 연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너희에게 맞는
남자들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 남자들에게 시집가 오순도순 살 수도
있는데 습인이 너는 욕심도 많구나"

보옥은 습인이 자기를 은근히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을 돌려보았다.

그러면서 습인의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습인은 마음을 추스르며 얼굴을 보옥의 가슴에 묻었다.

"그 다음 어떤 책을 보셨나요?"

"부책이라고 쓰인 궤짝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장부를 하나 꺼내어
보았지. 부책은 정책의 여자들보다 한단계 낮은 여자들의 운명을 기록한
장부인 셈인데, 그것 역시 무슨 말들을 적어놓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더란 말이야"

"예를 들면 어떤 것들인데요?"

습인은 정책의 여자들보다 한단계 낮은 여자들이라면 지체높은 분들의
첩 정도 되는 여자들이 아닐까 짐작하며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첫장을 펼치니 말이야, 한 그루의 계화 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연못이 있는데, 물이 없어 바닥이 드러나 있고 연잎과 뿌리는 말라
비틀어져 있더군"

"아"

습인은 그 여자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할까 싶어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뒷장에는 그림을 설명하는 시구절이 역시 적혀 있더군. 뿌리를
거느리고 꽃을 피운 줄기하나 향기롭더니 평생동안 아픈 상처를 안고
사네. 두 흙더미에 한 그루 나무 생긴 후로 향기로운 혼은 그만 고향
으로 돌아가네.

이런 시구절이니 내가 그 뜻을 헤아려 알 수가 있어야지.

뿌리를 거느리고 꽃을 피운 줄기는 앞장의 그림에 나온 연을 가리키는
것일 테지만, 그 연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두 흙더미에 한 그루
나무는 도대체 무슨 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보옥은 정말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하였다.

"가만 있어 보세요. 두 흙더미에 한 그루 나무라고 그랬죠?

두 흙더미는 차례로 쌓으면 규가 되고, 거기에 나무 한 그루가 붙으니
계가 되잖아요.

앞 그림에도 계화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그러니 계자 이름을 가진
여자가 연자 이름을 가진 여자를 괴롭히고 끝내는 죽이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부책이 첩들 중에서 빼어난 여인들의 운명을 기록한 장부라면, 아마
계자 이름을 가진 여자는 본처일 것이고 연자 이름을 가진 여자는
첩이겠죠.

본처에게 구박을 받다가 죽어가는 첩의 운명이 그 부책의 첫장에
기록되어 있는 거 아닐까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