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바람이 한창이다. 당연히 문화예술도 세계화돼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일찌기 세계의 그 누구도 만들지 못한 "입체도화"를 창출,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칠순의 노화가는 "한국인의 정서가 담기지 않은 예술은
결코 세계화될 수 없다"고 잘라말한다.

GI문화를 답습하면서 세계화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메마른 황토에서도 꽃을 피우는 엉겅퀴같이 은근하면서도 강한 한국인의
서정을 담은 것이야말로 진정 세계적인 예술이 될수 있다는 주장이다.

2년간의 식물인간 상태에서 일어나 입체도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킨
서양화단의 거목 변종하화백(69)을 서울성북동자택에서 만났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짧게 깎은 머리,맑은 피부와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

2시간 가까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채 자신의 예술세계와 한국화단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설명하는 노화가의 모습은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환자
와는 거리가 멀었다.

-건강은 어떠신가요.

<>변화백=어지러워서 일어서거나 걷지를 못해서 그렇지 다른 건 괜찮아요.
의식이 돌아온뒤 누워서 그림 생각만 하다가 일어나서 그리게 되니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에요.

아이디어가 계속 떠올라 하고 싶은 작업이 많아요. 요즘엔 검은
머리카락도 나고.설 수가 없어 세로로 된 그림을 못그리는 것이
아쉽지요. 아래위로 긴 캔버스에 그려야 제맛이 나는 것도 있는데.

-87년에 쓰러지셨던가요. 서울올림픽 준비중이었지요.

<>변화백=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이어령씨의 부탁으로 올림픽 앰블럼과
색채등을 봐주느라 무리했어요. 당뇨가 악화돼 합병증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던 것도 원인이 됐다고
생각해요. 세계각국 것이 다 있으니까 골고루 피워본다고 아예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지요.

-선생님 그림에는 유머가 있다고들 하는데요. 때묻지 않은 순수함도
있구요.

<>변화백=젊어서부터 지금까지 헤세를 좋아해요. 청년시절 박두진씨가
왜 헤세가 좋으냐고 묻더군요. "헤세에는 소년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했지요.

톨스토이와 도스도옙스키의 작품도 좋지만 거기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사람도 그렇지만 예술에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내용도 기법도 자연스러워야지요.잘 하려고 일부러 애를 쓰면 쓸수록
자연스러움은 사라져요. 못난 듯한 가운데 볼수록 정겹고 아름다운
대목이 있어야지요.

-꽃과 새를 주요소재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변화백=어린아이들이 내 그림을 좋아해요.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건
어른의 마음 역시 머문다는 걸 뜻하지요. 때묻지 않은 것에 대한 선망은
본능에 가까운 거니까요.

꽃과 새는 자연이에요. 특히 내가 그리는 꽃과 새는 한국의 꽃,한국의
새에요. 한국인이 살아 숨쉬는 한국의 자연이지요.

-현대미술 하면 흔히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들 여기는데요.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이해하기 힘든 추상미술을 해왔고 하고 있구요. 젊은 작가들의
경우 이같은 현상은 더 심각한데요.

<>변화백=요즘 젊은작가들중 상당수는 예술작업을 하는게 아니라
데몬스트레이션을 하고 있어요.

서양문물에 지나치게 호의적인 나머지 우리것의 본질을 알 생각도
않은채 서양식 데모를 하고 있는 거지요.

한국인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을 해야지요. 그래야 다른나라
사람에게도 설득력을 지닐 수 있어요.

-서양화가이면서 도화쪽에 관심을 기울여오신 걸로 유명한데요.
도자기에 특별한 힘을 쏟게 된 계기라도 있었는지요.

<>변화백=학창시절 수영선수였어요. 그래서 43년 일본군 해군하사관으로
뽑혔지요. 알고보니 자살특공대라고 해 만주로 도망쳤어요.

어찌어찌 신경시립미술원(현길림예술학교)에 편입했는데 일본군이 추적
해오는 바람에 봉천에 있던 다케다연구소로 피신했어요.

대구계성중학 시절 서양화의 기초를 가르쳐준 서진달선생이 하얼빈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 힘을 써주셨지요. 다케다씨는 조선분청사기에
미쳐있던 사람이었어요. 거기서 분청을 비롯,도자기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했지요. 물레질도 많이 했어요.

-본래 그림도 입체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요.

<>변화백=모든 예술에서 중요한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요.
평면은 아무래도 입체에 비해 리얼리티가 떨어져요. 피카소는 그래서
소위 입체주의라는 걸 만들었잖아요.

나는 아예 입체적인 그림을 만든 거지요. 캔버스에 나타내려는 형상을
한지로 만들어 붙인 뒤 그위에 캔버스를 덧씌우고 색을 칠하는 기법을
썼어요. 요즘엔 한지 대신 지점토를 상용해요.

-최근 발표한 입체도화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주목받고 있는데요.

<>변화백=아까 얘기했지만 일찍 도자기에 관심을 둔 탓에 옛도자기
수집도 많이 했어요. 돌아간 최순우국립중앙박물관장과도 각별한
사이였지요. 하지만 옛도자기를 그대로 흉내만 내서는 곤란하잖아요.

옛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건 그시대의 산물이니까요. 우리시대에는
우리시대의 예술품을 만들어야지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다 보니 여기에도 유화에 했던 것처럼 요철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욕심 안부리고 나타내고 싶은 것을 만들어 갖다 붙인 뒤 주위를
긁어내고 유약을 바른 뒤 구웠더니 평면에 그림만 그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나요. 이거구나 싶었지요.

분청과 백자의 전통을 잇되 입체그림을 넣음으로써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20세기말 한국의 예술양식을 만든 셈이지요.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글씨도 잘쓰시지요.

<>변화백=아버님(변성규)이 꽤 좋은 서예가셨어요. 어려서부터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지 한문공부를 했어요. 지금도 먹 가는 것만 보면 그사람이
글씨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알수 있지요.

아버님은 안진경체로 유명했는데 그때문에 지금도 내 글씨가 안진경체를
닮아 있지요.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걸로 아는데요. 문인들과도 가깝게 지내셨지요.

<>변화백=청록파 3인과 가까웠어요. 박두진은 피난시절 우리집에 있었고
조지훈은 파리에서도 만났지요. 정지용 김소월과도 친했구요.

시는 중학때부터 쓰기 시작해 쓰러지기 전까지 가끔 썼어요. 식물인간
에서 깨어나서도 곧바로 한편 써놓았지요. "하늘은 늘 푸른 잔디밭"으로
시작돼요.

-최근의 작업을 "서정적 풍경"이라고 이름붙인 것도 그같은 영향
때문인가요.

<>변화백=한국사람의 정서 혹은 서정은 분명 서양사람들의 그것과
달라요. 한국적인 것의 아름다움은 두고두고 정이 가는 것에서 비롯
된다고 봐요. 한국목기를 보면 어디 한군데 모난 데가 없잖아요.

색깔도 자극적이지 않아요. 원색이라도 숨을 한풀 죽여서 쓰지요.
눈에 확 띄거나 충격적인 것은 그런 점에서 한국인의 정서와는 맞지
않아요.

백남준씨의 작업같은 경우 나름대로 의미있다고 여겨지지만 한국인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는게 내 생각이에요.

-흰색을 많이 쓰는 것도 그런 영향이겠군요.

<>변화백=그렇죠.흰색은 숨을 죽인 색중 가장 밝은색이니까요. 순수함의
표상이기도 하고.승복에 먹물을 들이는 곳은 한국밖에 없어요.

제주도에선 감물을 들인 옷을 입는데 이것도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관습이죠.식물성 물감만큼 은근한 미감을 지닌 것은 없어요.

내가 쓰는 물감은 서양화물감이지만 대부분이 특별주문해 만든 것이에요.

노란색이라도 치자색을 쓰는 거죠. 그렇다고 서양사람들이 싫어하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죠. 오히려 독특한 색깔이라며 어떻게 그런 색을
자유롭게 쓸수 있는지 궁금해해요.

-유화와 도화외에 판화 작업도 하시지요. 판화는 판화만의 독특한
영역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판화기법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셨는지요.

<>변화백=판화에는 판화만의 세계가 있어야해요. 회화를 프린트하면
된다는 생각은 곤란하지요. 판화의 복잡한 기법과 공정을 알아야 제대로
된 판화를 만들 수 있어요.

동판과 실크스크린 작업을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장점이 있어요. 동판화의
경우 섬세한 부분을 나타낼 수 있는가 하면 실크스크린은 색상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종이를 이용,옛그림의 느낌을 내기도 하고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을
살릴 수도 있어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그림에서 분청과 백자의 장점에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한 입체도화까지 창출한 비결은 어디에 있나요.

<>변화백=비결은 따로 없어요. 혹 있다면 우리것을 알고 사랑하고자
노력한 것이겠지요.

한평생 옛것의 전통을 잇되 오늘에 맞는,동시대인의 감정과 생활상을
자연스레 담아내려 했어요.

될 수 있으면 일부러 잘그리려 혹은멋있게 보이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려 애썼어요.

더욱이 쓰러졌다 일어난 뒤론 우리것,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지닌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외에 다른 마음은 아무것도 품지 않았어요.

변화백은 26년 대구에서 출생,계성중학과 중국신경시립미술원을 나왔다.

국전추천작가를 지냈고 60-70년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했다.

서정성 강한 구상화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서울시문화상과
대한민국문화훈장을 받았고 세종문화회관로비의 대형벽화 "영광과
평화",교통회관 대형벽화 "춘하추동"등을 제작했다.

75년과 85년 대규모개인전을 열었고 그동안 제작한 유화와 입체도화
판화등 2백여점을 모아 11-28일 서울갤러리현대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화업50년 결산전을 열고 있다.

[대담=박성희문화부장]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