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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이 20일 경영이념 선포 5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구자경회장체제
25년"을 공식 마감하는 행사에 들어갔다.

오는 22일에는 회장 이취임식이 거행돼 적장자인 구본무부회장(50)에게
그룹 총수 자리가 승계된다.

국내 최초로 화장품등 생활용품을 국산화했고 60년대 첫 국산 흑백TV를
생산하는등 전자.화학분야 산업의 터밭을 일궈온 LG그룹-.

재계에선 드물게 "구.허씨 동업체제"를 유지하면서 한번의 잡음도 없었던
인화의 대기업그룹 LG.

사반세기 동안 LG를 이끌어온 구자경회장의 경영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조타수"를 바꾼 LG그룹이 3세 경영체제에서 어떤
경영혁신의 꽃을 피워낼지 시리즈로 엮어본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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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빌딩 지하대강당에선 의미있는 행사가
시작됐다.

LG그룹 경영이념선포 5주년 기념행사가 그것이다.

21일 저녁7시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털호텔에서 자축리셉션을 갖기까지
"경영스킬 경진대회"등의 행사가 이틀간 일정으로 열리게 된다.

이 행사는 그러나 단순한 "5주년"기념행사를 넘어서는 뜻을 지니고있다.

구자경회장이 LG그룹 총수로서의 반세기(25년)를 선종짓는 "마지막 행사"
이기 때문이다.

이 행사가 끝난 다음날,22일 오전엔 또다른 빅 이벤트가 치러진다.

그룹 회장 이.취임식이다.

구회장이 공식 은퇴하고 그의 장남인 구본무부회장이 총수자리를 물려받는
행사다.

이날 행사는 그러니까 "그룹경영의 차수를 바꾸는" 릴레이 이벤트,이를테면
"3일장"의 첫 날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대한민국 3대그룹"의 회장직 교체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셈이다.

그 때문인지 이날 아침에 열린 기념식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구회장의 표정이 특히 그랬다.

"담담하다"는 표현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풍겨나오는 모습이었다.

그의 기념사는 아주 간단했다.

"임직원 한사람 한사람이 타협없는 성실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라는
경영이념을 지켜나갈 때 10만 임직원 모두가 승리자가 될 것"이란 요지의
연설이었다.

구회장으로서는 지난88년 시작한 "21세기를 향한 경영혁신작업"을 이날로
완결짓는다는 나름의 의미도 덧붙여졌다.

연설 말미에 "지난 7년간 끊임없이 오직 경영혁신의 성공을 위해 함께
수고를 아끼지 않아온 임직원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말할 때는 감회가
서리는 듯 했다.

LG는 이번 행사로 지난 88년 구회장이 21세기 초우량기업을 목표로 제시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 일단락됐음을 그룹안팎에 선언했다.

90년 2월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등 2대 경영이념도
그룹에 착근됐다고 정리했다.

이제 그 구상과 이념을 실제 "경영과실"로 다지는 일은 구본무호에 넘긴다는
것이다.

구회장은 이미 올초 신년사에서 95년을 "제2 창업의 해"라고 정의했었다.

바야흐로 그 제2창업의 바톤을 아들인 구부회장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장막너머로 물러앉으려는 찰나다.

구회장이 지난 7년간 걸어온 경영혁신의 노정은 재계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켜왔다.

그런 평가에 인색한 재계인사는 거의 없다.

그가 주창하고 주도한 소그룹 분할 경영방식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전기.전자 화학 건설 금융 석유화학등 방대한 사업군을 CU(사업문화단위)
라는 소그룹으로 정리한 것이다.

독자적인 인사권(상무이하)과 경영의사결정권을 갖는 독립된 각 CU의 장을
대부분 전문경영인들로 채우는 경영실험도 단행했다.

이른바 "자율경영"을 기치로 내걸었다.

기업들이 상식수준에서 강조해 온 "고객이 왕"이란 개념을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란 그룹 경영이념으로 승화시켰다.

90년초 경영시스템으로 도입한 "고객결재란" "고객의 자리"등은 재계에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고객을 염두에 두고 모든 의사결정을 하는 기업문화를 정착시켰고 이를 통해
재계에 고객만족 경영을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전국을 휩쓸었던 노사분규의 파장이 "인화"를 제1의 모토로
내걸었던 LG에도 큰 후유증을 미치자,"노사"라는 종래의 대립적 개념을
"노경"이란 공동체적 의미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구회장이 25년의 재임기간동안 몰고온 변화는 이런 시스템에만 국한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끊임없는 관련다각화를 통해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일에도 남못지 않았다.

창업회장인 선친(연암 구인회)의 갑작스런 타계에 따라 70년 1월5일 그룹의
2대회장에 그가 취임했을 때 그룹 계열사는 럭키(LG화학) 금성사(LG전자)등
8개회사였다.

지금은 52개 회사로 늘어났다.

구회장의 취임당시 2백60억원이었던 그룹매출액은 94년기준 36조원으로
불었다.

70년 범한화재를 인수한 것은 그룹확장작업의 시작이었다.

73년에는 국제증권을 설립했고 80년엔 부산투자금융을 사들였으며 88년에는
LG신용카드를 세우는등 금융분야를 개척했다.

71년 희성산업(유통),84년 LG애드,87년 STM 설립등 유통 서비스분야로도
발을 넓혔다.

그룹주력인 화학.에너지와 전기.전자분야에선 관련다각화에 치중했다.

78년 럭키석유화학을 세워 나프타분해사업에 진출했다.

79년 금성반도체,87년 금성산전,89년 금성일렉트론 설립등을 통해선
가전부문에서 출발한 전기.전자사업을 전자부품 산업전자 반도체
소프트웨어로 확대.전문화했다.

구회장의 LG그룹은 그러나 이런 양적.질적 사업확대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를 안팎에 심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룹측은 그에 대해 "(다른 그룹들처럼)나서서 사업을 벌리는 대신 안으로
사업의 골을 깊이 파왔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더라도 급변하는 경쟁환경시대에 "덜 진취적이다"는 인상을 심어준
측면도 없지는 않다.

구회장은 이런 지적때문인지 퇴임 7년여전부터 "21세기"를 키워드로 하는
일련의 경영혁신 작업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격경영의 열쇠를 오는 22일오전 구본무부회장에게
넘겨준다.

70고령이라고는 해도 아직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구회장이 "선뜻"
아들에게 총수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재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여는,또 다른 측면에서의
"공격경영"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학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