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미술의 해'와 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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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이 쌓인 네모난 바위들과 나지막한 야산의 대비,먹색과 옅은 채식의
농도 조정에 의한 입체적인 음영의 거친 바위와 활달한 미점으로 묘사된
야산이 어울려 자아내는 참신한 느낌-.
조선조 후기의 빼어난 문인 서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대표작품인
"백석담도"소묘다.
표암이 한국회화사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이 작품에서 엿볼수 있듯이
개성이 강하게 표출된 현대적 감각의 서양화풍을 받아 들인데 있다.
전통적 화법에 서양의 원근법을 수용하여 입체감을 창출해 냄으로써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미술의 해"를 맞아 표암을 "1월의 인물"로 선정한 것도 그의 이러한
선각자적 화업을 기리기위한 것이라 할수 있다.
표암은 숙종39년 서울 장충동에서 판중추부사였던 강 금견 의 3남6녀중
막내로 태어나 8세때는 시를 짓고 13세때는 그의 글씨를 얻어다 병풍의
만드는 사람까지 있게 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20대때에는 잇단 부모의 죽음과 형의 귀양등으로 벼슬길에의 뜻을 버리고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하여 30여년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몰두했었다.
당시 성군이었던 영조는 표암의 재증이 초야에 묻혀 있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영조는 표암이 51세 되던해에 신하들에게 그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려 표암으로 하여금 오랜동안 절필을 하게
함으로써 벼슬길에 나오게 유도했다.
표암은 영조의 간곡한 배려로 61세가 되어서야 영능참봉이 된 뒤 63세와
65세에 기구과와 문과정시에 각각 장원급제하여 한성부판윤 호조참판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마지막에는 정헌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표암의 서화가로서의 필명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72세때 사절로 북경에 갔을때에는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만년에 자신을 가리켜 한퇴지의 문, 왕희지의 필, 고개지의 화를
겸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시서화의 삼절이었다.
그가 추구했던 예술의 세계는 바로 습기와 속기거 없는 문인서화의
경지였던 것이다.
표암은 시서화의 삼절답게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 진경신수의
발전, 풍속화와 인물화의 유행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서화론과 서화평
에서도 참신하고 독자적인 관을 확립했다.
"미술의 해"가 시작되는 "표암의 달" 기념행사들이 보다 뜻있는 결실이
걷우어지길 기대하는 바람 크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4일자).
농도 조정에 의한 입체적인 음영의 거친 바위와 활달한 미점으로 묘사된
야산이 어울려 자아내는 참신한 느낌-.
조선조 후기의 빼어난 문인 서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대표작품인
"백석담도"소묘다.
표암이 한국회화사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이 작품에서 엿볼수 있듯이
개성이 강하게 표출된 현대적 감각의 서양화풍을 받아 들인데 있다.
전통적 화법에 서양의 원근법을 수용하여 입체감을 창출해 냄으로써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미술의 해"를 맞아 표암을 "1월의 인물"로 선정한 것도 그의 이러한
선각자적 화업을 기리기위한 것이라 할수 있다.
표암은 숙종39년 서울 장충동에서 판중추부사였던 강 금견 의 3남6녀중
막내로 태어나 8세때는 시를 짓고 13세때는 그의 글씨를 얻어다 병풍의
만드는 사람까지 있게 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20대때에는 잇단 부모의 죽음과 형의 귀양등으로 벼슬길에의 뜻을 버리고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하여 30여년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몰두했었다.
당시 성군이었던 영조는 표암의 재증이 초야에 묻혀 있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영조는 표암이 51세 되던해에 신하들에게 그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려 표암으로 하여금 오랜동안 절필을 하게
함으로써 벼슬길에 나오게 유도했다.
표암은 영조의 간곡한 배려로 61세가 되어서야 영능참봉이 된 뒤 63세와
65세에 기구과와 문과정시에 각각 장원급제하여 한성부판윤 호조참판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마지막에는 정헌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표암의 서화가로서의 필명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72세때 사절로 북경에 갔을때에는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만년에 자신을 가리켜 한퇴지의 문, 왕희지의 필, 고개지의 화를
겸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시서화의 삼절이었다.
그가 추구했던 예술의 세계는 바로 습기와 속기거 없는 문인서화의
경지였던 것이다.
표암은 시서화의 삼절답게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 진경신수의
발전, 풍속화와 인물화의 유행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서화론과 서화평
에서도 참신하고 독자적인 관을 확립했다.
"미술의 해"가 시작되는 "표암의 달" 기념행사들이 보다 뜻있는 결실이
걷우어지길 기대하는 바람 크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