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령은 마에바라잇세이였다.

그는 마쓰시다촌숙에서 요시다쇼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으로 존황양이
운동에 특신하여 무진전쟁 때는 호쿠에쓰정벌군의 참모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유신정부의 참의가 되었다.

그리고 징병제도의 실시를 부르짓다가 암살당한 오무라마스지로의 뒤를
이어 병부대보가 되었으나,철저한 존황양이주의자인 그는 메잊 유신정부의
서구화정책에 강력히 반대하여 결국 사표를 던지고 고향인 하기로 돌아와
학숙을 열어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그의 주위에는 과격한 양이주의자,즉 국수주의자들과 불만 사족들이
모여들어 저절로 그는 그들 집단의 두령이 되어 버렸는데,구마모도에서
신풍련이 일어섰다는 것을 알자,뒤이어 자기네도 불길을 올리고 만
것이었다.

명륜관의 앞뜰에 피어오르는 거대한 모닥불은 봉기의 신호였다.

모여든 사족들은 5백여명이었다. 그들은 자칭 순국군이라 하여 커다란
깃발을 명륜관의 정문에 세웠다. 그러니까 그곳이 본영인 셈이었다.

새벽녘에 순국군은 출동을 개시했는데,한 부대는 경찰관서를 포위하여
공격했고,다른 부대는 곧바로 야마구치에 있는 현청을 향해 진격해갔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은 정부군의 신속한 반격 앞에 뒤틀리고 말았다.

히로시마 진대의 사령관인 미우라고로육군소장은 구마모도에서 신풍련의
봉기가 있자,가까운 하기의 과격파 집단도 언제 들고일어날지 모르니
만반의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취하 부대에 내려놓았던
것이다.

하기에서도 마침내 불길이 솟았다는 정보가 밀정을 통해서 접수되자,
미우라는 즉시 부대를 출동시켜 야마구치를 향해 오는 순국군을 중도에
가로막고 맹렬한 반격을 가했다.

화력뿐 아니라,병사의 수효에서도 월등히 우세한 정부군 앞에 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패퇴하여 도로 하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기 시내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는데,마에바라는 "반드시 우리
에게 신조가 있을 것이다"하고 진두에서 순국군을 독려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미우라는 의외로 저항이 끈질기자,구레항(오항)에 있는 정부의 해군까지
출동시켰다.

하기는 바닷가에 있는 도시였다.

며칠뒤 군함 두척이 나타나 순국군의 본영인 명륜관을 향해 냅다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명륜관은 박살이 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