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형부총리에게-.

먼저 재경원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된 데 대해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하기야 이번 부총리 연임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습니다.

재무부장관을 지낸뒤 경제기획원을 맡고 있던 터였으니 두 부처가
통합된 재경원의 장관 경합에선 아무래도 점지받을 확률이 컸겠지요.

더구나 부총리의 얼굴에선 거짓이나 술수 비슷한 것 조차 찾아볼래야
찾아보기 힘듭니다.

웬만한 일로는 크게 웃거나 찡그리는 법도 없고요.

모나지 않고 욕 안먹는 처신도 그렇고,매사에 진실하고 성실한 자세도
부총리연임의 가점요인이 됐을 겁니다.

게다가 관운까지도 좋았다는게 호사가들의 말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무엇보다도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걱정스러운 점도 많습니다.

지금의 경제는 "양의 풍요"만 누리고 있는게 아니냐는 것이지요.

좀 심하게 말씀드리면 "질의 빈곤"은 고려치 않고 이것저것 이벤트성
일만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원칙과 방향이 제각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니 대통령의 말마따나
"혼신의 힘을 쏟아 일을 한다" 하더라도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이지요.

적당한 예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정부조직 개편도 "이럴 땐 이렇게
대응한다"는 식의 청사진 하나 없이 일단 터뜨려 놓고 본 것 아니었습니까.

새로 짜인 경제부처를 시운전하고 정상궤도에 올리는 일도 그래서
상당기간 진통이 따를 수 밖에 없겠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경제는 어떤 경우건 일관성과 논리적 설명이 뒤따라야 마땅한데 어제의
정책과 오늘의 조치 사이에도 그런 연결고리를 찾기가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부총리께선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건 경제를 "정치"로부터 격리시키고 보호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경제장관들,더 정확히 말하면 경제부총리의 책임
아니겠습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UR(우루과이 라운드)협상과 관련,42조원의 농발자금
지원 같은게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줬다기 보다는 시혜차원에서 "물고기를
직접 잡아 주었다"는 비판도 있거든요. 그래서 감히 말씀 드립니다.

이제부턴 경제논리에 반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노(No)"라고 말하십시오.

"노"에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나 공약사업도 예외가 될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닉슨대통령 회고록에서도 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유능한 대통령이 되는 길은 선거때 한 공약을 얼마나 지키지 않느냐에
달려있다"는 구절 말입니다.

정치에 좌지우지되는 경제의 폐해가 얼마나 심하면 대만 같은 나라에서는
부총리격인 경제부장을 고지식한 이공계출신위주로 보임하겠습니까.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과천사람들은 홍부총리를 평해 "윗사람이
시키는 일에 대해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년부터 3년동안 크고 작은 선거가 지속되면서 정치가
경제를 지배할텐데."라며 걱정스러워 한답니다.

다소 거북스러운 얘깁니다만 이같은 분위기는 부총리의 철학과 소신을
못 미더워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부총리 자신이 색깔을 분명히 내야
합니다.

특히 대기업정책에서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경쟁력이니 기업활성화니 하는 것들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 펴온
정책은 기업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빚어 낼수 있는 부작용을
막는데만 급급해 온게 사실입니다.

물론 정부는 "시장의 실패"에 주목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를 방지키 위해 시행해온 각종 시책은 기업하려는 의욕 자체를
무지르기 일쑤였고,그것이 "규제의 실패" 혹은 "정부의 실패"를 낳은
셈이지요.

결국 한국경제는 시장실패도 정부실패도 어느것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고 왜곡만 있었다는게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이 역시 원칙과 기준없이 경제정책이 시류에 떠밀렸던 때문이고 그
한가운데는 무색무취한 부총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모든게 부총리만의 책임이라는데는 어폐가 있습니다.

근자에 들어 부총리는 말이 부총리였지 뭐 정책수단이 있었습니까.

기껏해야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그의 힘을 빌려 경제부처를 장악하는
"호가호위형" 부총리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재경원 부총리는 다릅니다.

조세 금융 예산등 "경제전권"을 한손에 쥔,문자 그대로의 "막강 경제총수"
가 아닙니까.

경제논리와 기준만 명확하다면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홍부총리의 "관운"은 "소신의 결과"였다는 평가가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