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 시내의 요소요소에 포고문이 나붙었다. 폐도령에 관한 것이었다.

내막적으로는 사이고의 작은 왕국처럼 되어 있었으나, 독립을 선포한 것도
아니어서 겉으로는 여전히 중앙정부의 지배하에 있는 한개의 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키지는 않았으나,폐도령의 포고문도 요소요소에 게시했던
것이다.

그 포고문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무슨 거창한 사태라도 발생한 것처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이 휘둥그래지기도 했고,입이 딱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놀라움은 크게 두 갈래라고 할수 있었다.

분노를 느끼는 놀라움과 그와 반대로 속으로 야,이것 봐라,썩 잘된
일이로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분노를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족들이었다.

자기들의 분신이라고 할수 있는 칼을 이제 차고 다니지도 못하게 하니,
말하자면 날개가 꺾인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도대체 이따위 돼먹지않은 수작을 부리다니.정말 말세군.말세야"

"맞다구.말세지. 우리가 누군데 우리한테 칼을 못차고 다니게 하는
거야"

"실컷 써먹고는 버린다더니,바로 그 짝이 아니고 뭐야.막부 타도를 누구
힘으로 했느냐 말이야"

"죽은 동지들이 가엾기만 하군. 원혼들이 구천에서 통곡을 하겠어"

"이게 다 오쿠보 그 배신자의 수작이라구. 그 놈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야 된다니까"

"아-이거 분하고 원통해서 살수가 있나"

사족들은 공고문 앞에서 이렇게들 거침없이 분노와 한탄을 쏟아놓았다.

"이제는 난슈 도노가 일어서시겠지"

"맞어. 그러실 거야. 틀림없어"

"까짓것 그러시기만 하면 내사 맨 앞장을 서서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울거라구. 싸우다 죽는 것이 백배 낫다구. 이대로 살아서 뭘 하느냐
말이야"

이렇게 사이고의 결단을 기대하며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을 뇌까리기도
했다.

사족들이 그처럼 마구 지껄여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닝(상인)이나
공인, 농민등 일반 백성들은 그 포고문 앞에서 아무도 입을 열질
않았다.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들에 역력했다.

그러나 그런 표정도 옆에 칼을 찬 사족들이 있을것 같으면 얼른 감추듯
싹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그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시원한 일이로구나. 참 잘한 일이야"

"세상 기똥차게 달라지네"

"이제 우리 같은 것들도 좀 기를 펴고 살겠군"

그들의 목을 날려도 아뭇소리 못했던 사족들의 칼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통쾌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