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부가 1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신채호(1880~1936)는 항일독립
운동가이고 사학자이며 언론인이라 할수 있다.

단재는 조선조말 고종17년 12월8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고 호는 일편단생 또는 단제이며 신숙주의 후예이다.

가명은 유맹원. 10여세에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던 신채호는 189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11월에 황성신문이 무기정간되자 그 이듬해에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주필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열정적 논설을 발표하였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고 이듬해부터 1910년까지 외세침입을 격퇴한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장군을 우리민족의 삼걸로 뽑아 전기를 저술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여 전원위원회위원장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노선에 반대하고 사임하였다.

그는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었고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
역할을 하였으며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해에서 1923년 조선혁명
선언이라고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단재는 1927년에는 신한회 발기인 무정부주의동방동맹에 가입하였고
1928년 타이완으로 가다가 일경에게 채포되어 여순감옥에서 복역중 1936년
옥사하고 말았다.

신채호의 곧고 철저한 성품을 말해주는 일화는 많다.

일재가 "조선민사령"으로 호적을 다시 만들때, 그는 "일제호적에 등재하는
것은 스스로 신민임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상해에서 인편에 취적을 거부케
하여 무적자가 되었다.

또 한일합방이 되자 "세상 어디에도 머리숙일곳이 없어졌다"면서 옷을
온통 적셔가면서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세수를 하였다 한다.

그의 역사학은 민족주의적이고 민중중심사관이 뚜렷하며 또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기록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한국사기술을 거의가 고대사에 국한하였지만 특징을
들면 단군 부여 고루려를 중심으로 상고사를 채계화하였고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중국의 동북지역과 료서지방에까지 확대하였으며 한사군을
반도밖이나 또는 전혀 실존하지 않았고 주장하고 삼한의 이동설과
"전후삼한설"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한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등이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