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650) 제3부 정한론 : 강화도앞바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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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보는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추진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대만 정벌을 단행해서 청나라를 우리가 눌러 놓았단
말입니다. 조선국에 손을 댔을 경우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가장 염려가
됐었는데, 이제 그 나라는 허우대만 클 뿐 실상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둘째는 서양 려러 나라들도 막상 루리가 무력을 사용했을
경우 그 이유가 타당하기만 하면 중재에 나설뿐 직접 자기네가 우리와
맞서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체험했어요. 그 두가지가 가장 염려되던
일인데, 이제는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할게 없을것 같단 말입니다. 셋째는
가라후도와 지시마의 교환으로 러시아와의 불편했던 관게도 해결됐으니,
다음은 당연히 조선국과의 문제를 풀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지요.
2년전과는 이처럼 여건이 달라졌으니, 누가 정사를 담당했더라도 이제부터는
조선국 문제에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을수가 없다 그거예요. 그리고 이번에
마침 절호의 기회가 오기도 했고요. 식수를 구하러 갔는데 포격을
가하다니, 그런 야만적인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수가 없어요. 그것을 문제
삼아서 이 기회에 조선국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거예요. 2년전에 사표를 내고
물러난 분들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서슴없이 이와같은 나의
주장을 펼칠 것입니다. 시대란, 그리고 시대를 요리해 나가는 정치란 언제나
가변적인 젓이니까요"
오쿠보가 말을 마치자, 만장일치로 지지하는 그런 분위기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2년전의 반정한파가 이제는 명실공히 정한파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조선국 문제를 이 기회에 해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지자 다음은 그 방법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방법에 있어서는 강경,온건 두 갈래로 의견이 갈리었는데, 강경론은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한양으로 밀고 들어가서 항복을 받는 식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왕정복고를 이룩한 이후 지금까지 8년동안 국교 교섭을 거절
당해온데 대한 분풀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온건론은 일단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되, 종전처럼 봉래부를 상대로 할
것이 아니라,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쪽으로 가서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강력하게 교섭에 임하자는 것이었다.
만약 그래도 종전과 다름없이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청나라를 과소평가하고, 또 서양세력의 태도를 체험했다 하더라도
그런 순서로 나가는 것이 그들을 덜 자극한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온건론이 채택되어 전권대사를 파견하기로 결정을 보았는데, 기도고인
이 그 전권대사를 맡았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5일자).
"그 이유는 첫째, 대만 정벌을 단행해서 청나라를 우리가 눌러 놓았단
말입니다. 조선국에 손을 댔을 경우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가장 염려가
됐었는데, 이제 그 나라는 허우대만 클 뿐 실상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둘째는 서양 려러 나라들도 막상 루리가 무력을 사용했을
경우 그 이유가 타당하기만 하면 중재에 나설뿐 직접 자기네가 우리와
맞서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체험했어요. 그 두가지가 가장 염려되던
일인데, 이제는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할게 없을것 같단 말입니다. 셋째는
가라후도와 지시마의 교환으로 러시아와의 불편했던 관게도 해결됐으니,
다음은 당연히 조선국과의 문제를 풀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지요.
2년전과는 이처럼 여건이 달라졌으니, 누가 정사를 담당했더라도 이제부터는
조선국 문제에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을수가 없다 그거예요. 그리고 이번에
마침 절호의 기회가 오기도 했고요. 식수를 구하러 갔는데 포격을
가하다니, 그런 야만적인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수가 없어요. 그것을 문제
삼아서 이 기회에 조선국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거예요. 2년전에 사표를 내고
물러난 분들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서슴없이 이와같은 나의
주장을 펼칠 것입니다. 시대란, 그리고 시대를 요리해 나가는 정치란 언제나
가변적인 젓이니까요"
오쿠보가 말을 마치자, 만장일치로 지지하는 그런 분위기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2년전의 반정한파가 이제는 명실공히 정한파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조선국 문제를 이 기회에 해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지자 다음은 그 방법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방법에 있어서는 강경,온건 두 갈래로 의견이 갈리었는데, 강경론은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한양으로 밀고 들어가서 항복을 받는 식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왕정복고를 이룩한 이후 지금까지 8년동안 국교 교섭을 거절
당해온데 대한 분풀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온건론은 일단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되, 종전처럼 봉래부를 상대로 할
것이 아니라,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쪽으로 가서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강력하게 교섭에 임하자는 것이었다.
만약 그래도 종전과 다름없이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청나라를 과소평가하고, 또 서양세력의 태도를 체험했다 하더라도
그런 순서로 나가는 것이 그들을 덜 자극한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온건론이 채택되어 전권대사를 파견하기로 결정을 보았는데, 기도고인
이 그 전권대사를 맡았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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