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얼굴을 식별할수 있을만한 거리까지 단정이 다가오자 수비병
가운데 누군가가, "서양것들이 아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너도 나도 떠들어댔다.

"맞어. 아닌 것 같다구"

"복장은 틀림없는 서양것들인데."

"머리가 까만 것 같잖아. 서양것들은 머리가 노랗다구"

마치 이쪽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단정이 그 자리에 스르르 멈추더니,
수병 하나가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물이가 옵소서 물이 구하로 왔소다-" 그러면서 물통 하나를 번쩍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왜놈이다!"

"맞다! 틀림없다구"

"왜놈들이 식수를 구하러 온것 같애"

수비병들이 떠들어대는 가운데 절제도위가 포대의 석벽 위로 껑충
뛰어올라 응답을 하듯 소리쳤다.

"썩 물러가라! 여기는 물을 공급하는 곳이 아니다. 일본인은 동래부의
왜관으로 가야한다. 그곳만 출입이 허용되어 있다. 알겠느냐-"

그러자 수병은 다시, "물이가 옵소.물이가- 물이 구다사이(주시오)-
구다사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들어올린 물통을 쾅쾅 두들겨댔다.

다른 수병들도 우르르 물통을 들고 일어서더니, "물이 구다사이-"
"물이가 옵소- 옵소-" "구다사이- 구다사이-" 일제히 외쳐대며 냅다
물통을 북치듯 하였다.

몇몇 녀석은 약을 올리듯 마구 삿대질이었다.

"물러가지 못할까- 안 물러가면 쏜다-"

그러나 물러갈 기색은 조금도 없이 수병들은 악다구니를 쓰듯 소리소리
질러대고 있었다. 마침내 병마첨사가 마상에서 명령을 내렸다.

"위협포격을 하라-" 곧 쿵! 쿠쿵! 포성이 진동했다.

대포소리에 놀란듯 단정은 재빨리 방향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실은 놀란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조선군 측에서 먼저 포격을 해오도록 유인하는데 성공했으니,
서슴없이 다음 작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단정에는 함장인 이노우에가 몸소 타고 있었고,보좌관인 스기다 소위도
물론 타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스기다에게 의미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본함에 신호를
보내라구. 이쪽으로 항진해 오도록." 하고 명령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