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호 < 럭키금성경제연구소 대표이사 >

성수대교의 붕괴는 우리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우리경제, 우리사회의 중병을 단적으로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
이었다.

그러나 성수대교 붕괴가 갖는 상징성은 한국이라는 지역의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성수대교의 붕괴가 성장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의 소산이자 건전한 가치관의
전도현상이 초래한 결과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면 이는 정도의 차이문제
이며 시간의 완급문제이자 본질적으로 현대를 살고 있는 인류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오랫동안 인류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온 기본적인
가정, 또는 기본적인 세계관을 우리들은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고 그로 인한 결과가 다르게
마련이다.

과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요한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은 과연 옳으며 우리에게
바람직한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6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형성되어 서구의 물질문명을 꽃피우고
지금과 같은 지구촌을 형성하게 한 대표적인 패러다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과학적인 방법만이 믿을수 있다는 가정이다.

볼수있고 만질수있어 객관적으로 증명할수 있는 것만이 지식이며 진리라는
가정이다.

지식과 진리탐구에 있어 느낌이나 주관은 무시된다.

세계는 시계와 같이 기계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는 환경과 자연을 조작하고 실험하여 그 움직임을 예측할수 있고
결과적으로 자연환경을 통제할수 있다.

둘째, 물질적인 면에서의 성장,즉 경제성장은 높을수록 좋다는 가정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자동차사고가 많을수록 국민총생산(GNP)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물질적 성장이 갖는 이러한 허구성을 간과한 성장지상주의의 패러다임은
성장자체가 목적이 되게 하기에 충분했다.

셋째, 공업화 산업화에 대한 믿음이다.

분업과 기계화로 특징지어지는 공업화는 물질적인 생활수준을 높이는데는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행복수준의 상승과 직결되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공업화에 따른 인간의 부품화, 기계에의 예속, 이에 따른 소외감의 증폭은
현대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넷째, 모든 사람들이 자유경쟁시장에서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경제
활동을 하면 세상은 좋게 되리라는 가정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이 가정은 부단한 이익추구를 정당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익추구의 과정과 가치의 균형을 고려하는데는 소홀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분명 이같은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서구사회, 나아가 인류사회는 물질적인
면에서 놀라울만한 생활수준의 향상을 이룩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상의 패러다임을 앞으로도 계속 추구하게 되면 그결과는
지구와 인류의 황폐화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에 기초한 우리들의 사고와 행동의 결과는 환경파괴,
국가간 지역간 계층간의 빈부격차, 장단기적으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능력의 결여, 그리고 마약과 노름 급증하는 범죄로 대표되는 삶의
의미와 건전한 가치관의 상실등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최근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인식의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어 가고 있으며 그 윤곽도 의외로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객관적인 증거 못지않게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지혜를
중시한다.

또한 인간의 상호존중, 생명과 사물에 대한 경외감과 환경존중, 물질적인
것 못지않게 정신적인 측면을 중시한다.

부분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인 고려와 균형, 모든 사물, 모든 생물간에
존재하는 연결성과 상호의존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기업의 경영방식도 변할것을 요구
하고 있다.

기존의 기계적이고 시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고안된 피라미드형 계층구조의
혁신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조직구조의 운영시스템은 인간의 가치와 직관이 존중되고 개인의 창의성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위로부터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 인간을
대체할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하는 조직으로는 더이상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 지식사회가 진전될수록 생산성에 못지않게 창의성이 중시되고
물질보다 인간자체가 중요한 부가가치의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와 의존성이 파악되면서 환경존중이 중요한 기업
윤리로 정립되고 있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변화에 먼저 적응하는 기업은 성공하는 기업이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결국 실패하는 기업이 될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기업은 보다 유기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환경을
보호하고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인 경영형태를 보이게 될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확립과 실행에 기업의 선도적 역할이 특히 중요한
것은 기업이 현재 우리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일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는 국가보다도 훨씬 영향력있는 지배적인 조직이 될것이기 때문
이다.

또한 기업은 가장 창의적이고 변화에의 대처능력이 탁월한 사회조직이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결국 쓰러질것이며 기업의 진정한 변화없이는 인류와
지구를 살릴 방안도 별로 없다는 사실에 기업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립과 실천에 앞장서는 경영인들의 자긍심과
사명감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