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에서는 러시아 공사를 불러 엄중히 항의를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대응을 할 엄두를 못내는 터이라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이와쿠라 구미사절단이 서양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모든 정사를 관장하고 있을 때였다.

사이고는 황무지인 가라후도의 그런 불상사보다 조선국과의 국교 문제가
월등히 중요해서 그 쪽에 주로 머리를 쓰고 있었다.

그해 10월 정한론정변이 일어나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 고관들이 모두
사표를 내던지고 태정관을 떠났는데, 그때 러시아와 교섭을 벌이고 있던
외무경인 소에지마도 관직에서 물러나 버렸기 때문에 그 문제는 미결인채로
오쿠보의 새로운 정권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어 그 무렵 그 나라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로 간 것은 이듬해 6월이었다.

그러니까 대만 원정이 감행되고 있을 때였다.

막부 진영의 마지막 저항세력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가서 그곳에 잠시나마
공화국을 수립했다가 항복한 에노모토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구로다
기요다카가 홋카이도 개척사 장관이 되자 그 밑에서 그를 도와 홋카이도와
가라후도의 개척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네덜란드에 유학을 했던
사람이었고, 또 홋카이도에서 가라후도 문제로 러시아 측과 실무접촉을
해왔던 터이라, 그를 러시아 공사로 임명하여 가라후도 문제를 직접 러시아
정부와 협상해서 해결하도록 했던 것이다.

페테르부르크로 부임해간 에노모토는 러시아 외무성의 아시아국장인
스트레모프를 상대로 교섭을 벌여 11개월만에 가라후도 문제를 매듭지었다.

가라후도 남부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 러시아의
소유인 쿠릴열도를 일본측에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가라후도와 쿠릴열도를 교환하는 셈이었다.

쿠릴열도는 스무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측에서는 지시마열도
라고 했다.

그 스무개 가운데서 홋카이도에 인접해 있는 구나시리 에토로후 두 섬은
막부가 체결한 노일화친조약에서 일본 것으로 인정이 되어 있어서 나머지
열여덟개의 섬을 넘겨받는 대가로 가라후도를 포기한 것이었다.

에노모토와 러시아 외무장관인 고르차고프 사이에 가라후도, 지시마
교환조약이 조인된 것은 1875년, 메이지 8년 5월 7일이었다.

그러니까 대만 원정 문제가 해결된 이듬해의 일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