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삼봉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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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구름 해사히 맑고/산은 둘러 적적한데/지는 잎 소리없이/땅에 가득
붉어라/다릿께에 말 세우고/돌아갈 길 묻노라니/모르겠네 이 몸 있는 곳
그림속은 아닌지"
누가 시중유화라고 했던가.
가을 산속의 선경을 묘사한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시 한수를 읽어보면
그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한 주역이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문무를 겸비했고 호방한 혁명가적 기질을 지녔던 그는 이른 시재뿐만
아니라 이론가 경세가로서의 걸출한 재질을 타고났다.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그는 청.장년시절 9년동안의 유배.유랑생활을
하는동안 정치기강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민생이 궁핍하여지는 것을 몸으로
확인하면서 시련속에 개혁의지를 다져간다.
이성계와 손을잡은 삼봉은 1390년 보수세력을 몰아낸뒤 전제개혁을 단행,
전적을 모두 불태우고 과전제를 실시함으로써 조선개국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
전국의 토지는 모두 공전이 됐고 귀족들의 농장은 몰수됐다.
개국작후인 1394년에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치국의 대요와 관제등
모든 제도를 제정, 조선법제를 기틀을 만들었다.
특히 성리학자로서 불교가 이땅에 들어온 이래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불교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이론화 시킨것은 조선왕조의 사상적기초를
다진 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건국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조선
왕조의 기초를 놓았던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제1차 왕자의난때 역적으로 몰려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아 그가 정식
으로 신원된 것은 450여년이 지난 고종2년(1865)경복궁을 중건할 때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공언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삼봉이었지만
당시에도 이론만으로는 성급하게 보수세력을 꺾을수 없었던 것이 혁신세력
이었던듯 싶다.
그가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괄료지배체제를
주장한 것이라든지 원시유교의 민본사상을 강조, 백성은 통치자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혁명이론은 재음미 되어야 할 대목들이다.
한양정도의 중동인물이 되어 정도를 실현시키고 도성의 기지를 확정한
인물이 바로 삼봉이었고 4대문 4소문 경복궁및 궁금과 5부52방의 이름을
지어 서울창건으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삼봉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퇴계로" "월곡로"는 있어도 "삼봉로"는 없다.
"수기치인"의 학문이 유학인데 삼봉은 "수기"룰 못하고 "치인"에만 주력
했기 때문일까.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30일자).
붉어라/다릿께에 말 세우고/돌아갈 길 묻노라니/모르겠네 이 몸 있는 곳
그림속은 아닌지"
누가 시중유화라고 했던가.
가을 산속의 선경을 묘사한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시 한수를 읽어보면
그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한 주역이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문무를 겸비했고 호방한 혁명가적 기질을 지녔던 그는 이른 시재뿐만
아니라 이론가 경세가로서의 걸출한 재질을 타고났다.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그는 청.장년시절 9년동안의 유배.유랑생활을
하는동안 정치기강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민생이 궁핍하여지는 것을 몸으로
확인하면서 시련속에 개혁의지를 다져간다.
이성계와 손을잡은 삼봉은 1390년 보수세력을 몰아낸뒤 전제개혁을 단행,
전적을 모두 불태우고 과전제를 실시함으로써 조선개국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
전국의 토지는 모두 공전이 됐고 귀족들의 농장은 몰수됐다.
개국작후인 1394년에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치국의 대요와 관제등
모든 제도를 제정, 조선법제를 기틀을 만들었다.
특히 성리학자로서 불교가 이땅에 들어온 이래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불교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이론화 시킨것은 조선왕조의 사상적기초를
다진 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건국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조선
왕조의 기초를 놓았던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제1차 왕자의난때 역적으로 몰려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아 그가 정식
으로 신원된 것은 450여년이 지난 고종2년(1865)경복궁을 중건할 때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공언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삼봉이었지만
당시에도 이론만으로는 성급하게 보수세력을 꺾을수 없었던 것이 혁신세력
이었던듯 싶다.
그가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괄료지배체제를
주장한 것이라든지 원시유교의 민본사상을 강조, 백성은 통치자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혁명이론은 재음미 되어야 할 대목들이다.
한양정도의 중동인물이 되어 정도를 실현시키고 도성의 기지를 확정한
인물이 바로 삼봉이었고 4대문 4소문 경복궁및 궁금과 5부52방의 이름을
지어 서울창건으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삼봉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퇴계로" "월곡로"는 있어도 "삼봉로"는 없다.
"수기치인"의 학문이 유학인데 삼봉은 "수기"룰 못하고 "치인"에만 주력
했기 때문일까.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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