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2년 서독의 브란트 사민당 정권이 동독을 상대로 동서독 기본관계
협정을 맺었을때 서독의 야당인 기민당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반대했다.

소련의 위성국에 지나지 않는 동독을 사실상 승인해 주고 그 결과 동독의
국제적 지위를 높여주게 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독에 대해 큰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협정에 찬성할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브란트정권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 협정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동독의 국내외적 입장을 강화시켜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때로부터 17년뒤인 89년에 동독 사람들로 하여금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게 했다.

그래서 90년에 동독을 무너뜨리게 하는 지뢰역할을 수행하게 한것이 바로
동서독간 협정이었다.

그 협정이 동독을 안으로부터 무너지게한 지뢰역할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화시켜 말해 그 협정을 통해 그동안 제한적으로 전개됐던 동서독
사이의 교류가 매우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통신과 통행및 통상의 3통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면서 동독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인식하게 됐다.

또 그러한 체제로의 합류를 갈망하게 됐으며 그러한 인식과 갈망이 마침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지난 75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가 열렸다.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35개국이 참갛나 이회의는 헬싱키선언을 채택했다.

헬싱키선언은 2차대전이 끝난 뒤에 수립된 유럽의 국제질서를 인정한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독일의 분단을, 그리하여 동독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었고
동유럽이 소련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현상유지 원칙을 선언한 것이다.

이 조항을 두고 서방세계 보수우익 계열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비판이
높았다.

소련에 대한 굴복이라는 비판이었다.

그때 미국에 망명해 있던 소련의 솔제니친은 "헬싱키선언은 서방 세계가,
특히 미국이 동유럽을 소련에 팔아먹은 매각증"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헬싱키 선언에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게 하는
지뢰가 들어 있었다.

인권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규정, 그리고 정보의 유통을 보다 더
자유롭게 하고 활성화시키게 하는 규정등이 그것이었다.

이 규정들은 공산체제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인권상황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깨닫게 했다.

또 서방 세계로의 합류를 선망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나온 구호가 바로 저 유염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피주의"였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는 결국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실현이 가능하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헬싱키선언이 채택된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90년에 들어와
동유럽의 공산체제에는 조종이 울렸으며 91년에는 마침내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지난 21일에 조민된 북한과 미국사이의 협정은 물론 동서독기본관계협정
이나 헬싱키 선언과 같지 않다.

그러나 공통점들이 있다.

그 첫째 공통점은 북-미 협정도 공산체제쪽을 도와주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외교 승인과 경제-기술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외교상
숙원을 해결했으며, 그것을 발탄으로 서방의 선진 민주국가들과의 수교및
협력에 들어갈수 있게 됐다.

어떻게 보면 외교적으로 횡재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 둘째 공통점은 그러나 북-미협정도 공산체제쪽을 변질시킬수 있는
지뢰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방 세계의 민주적 자본주의 바람이 들어갈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북한은 그 바람을 막으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율일 것이다.

북한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공산정권이 붕괴한 원인이 바로 서방 세계와의
교류를 통한 민주자본주의의 영향 유입에 있다고 이미 판단하고 있다.

김일성스스로 중국의 개방정책조차 비판하지 않았던가.

북한에서 서방세계의 바람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바람막이가 이길 것인가는
우리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이 아닐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할 일은 우리 한국의 영향이다.

우리 한국과 북한의 교류 협력이 활발해질때 북한내에 가장 큰 바람이
일어나리라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북한은 남북대화의 재개나 진전에 큰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해답은 우리 내붕에 있다.

우리 한국을 도덕적으로 건강한 민주적 복지사회로 발전시켜 북한에 대해
큰 자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이 큰 자력을 발휘해 넓은 자장을 형성할때 북한은 그 자력에 끌려
그 자장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