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의 붕괴를 계기로 조만간 15개 한강다리에 대한 정밀안전진단이
일제히 시작되리라고 한다.

교량 관리당국뿐 아니라 소위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진단능력에
대한 불신도 만연돼 있긴 마찬가지지만 사후약방문격인 안전점검
자체만이라도 제대로 시행됐으면 하는 것이 "목숨을 걸고" 한강다리를
건너 다니지 않을수 없는 시민들의 바람이다.

모든 관심이 한강다리의 안전여부에 쏠려 있는듯 하지만 본란은
이번 사고가 다리의 안전진단과 더불어 행정당국의 사고대응체제도
정밀 재검검해야할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각종 대형사고 때마다 우리가 번번이 목격하게 되는 묘한 모습
하나가 있다.

위기상황이 닥치면 평소에는 실종된듯 하던 시민정신이 기적같이
되살아나는 반면 투철한 것처럼 떠들어대던 행정관리들의 책임의식은
실종되고 마는 현상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뒷얘기 가운데서도 신문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게하는 얘기는
시민의 첫신고에 고위관청 직원들이 보였다는 반응이다.

사고당시 운좋게도 벼랑 바로 앞에 멈춰선 시민 유해필씨는 즉시
휴대폰으로 내무부와 청와대 민원실에까지 위급상황을 신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고위 관청직원들의 반응은 "담당이 아니다"라는 답변
뿐이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대형 증권회사 부장직에 있는 한
지식인의 증언이다.

고위 행정관청의 책임의식실종과는 대조적으로 현장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행동도 민주시민의식을 확인케 한다.

그중에서도 부상당한 몸으로 구조에 앞장섰던 의경11명의 미담은
오늘의 우리 젊은이들이 모두다 오렌지색에 물든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동시에 "공직사회의 윗물은 맑아졌는데 아랫물이 썩었다"는 진단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 의경이 전하는 얘기는 더욱 감동적이다.

의경에게 인공호흡을 받고 깨어난 중년 남자가 자기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을 구조하라고 하여 의경이 잠시 자리를 떴다 돌아와보니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이 보여주고있는 이러한 고귀한 자기희생정신과
신고정신은 행정관리들의 책임의식이 뒷받침되지 않는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아무리 신고포상제도까지 만들어 신고를 독려한다 해도 담당공무원의
근무자세와 의식이 바뀌지 않는한 "담당이 아니다"는 식의 대답만
계속해서 되돌아올 뿐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몇개 땄느니,선진국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하는 허장성세는 이제 제발 걷어치우고 위기 대응체제 하나만이라도
바로 세우는 일에 나서야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