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밤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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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밤섬을 옛날에는 "율주" 또는 "가산"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조초부터는 관원을 상주시켜 감초등 약초와 뽕나무를 많이 심고 양과
염소를 방목했던 탓으로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작은 섬이다.
밤섬에는 고려때의 명신 김<>가 손수 심은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가
있어 유명했고 주위의 푸른 버드나무숲과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장관을
이루어 "율도명사"는 마포8경중의 하나로 꼽혔다.
따라서 봄이나 여름철이면 배를 띄우고 청흥을 즐기는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관리들의 연회장이 되어 밤섬은 늘 붐볐다.
"세 갈래 물 한 쌍 섬을 두른 것이,/그 가운데를 백로주가 열렸다.
/작은 섬 물결따라 가지않고,/강중에 그대로 떠 있구나.
/주점 한 두 채 모래언덕에 있는데,/관청 밭은 나루터까지 다하았다.
/태평성대의 좋은 기상,/어부들의 피리소리가 마을 노래에 섞인다"
지봉 이 일 졸 광의 아들이며 인조때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동주 이민구
(1623~1649)가 밤섬의 풍광을 읊은 시를 보면 섬은 원래 2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은 밤섬이 비가 많이오지 않으면 여의도와도 이어지는
섬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밤섬의 아름다운 경관은 광복뒤까지 고스란히 남아 56년8월 이곳
백사장에서 사육제를 열어 풍류를 즐긴 문인들이 돌아오다 나룻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를 낸 사고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처럼 시민의 안식처로 각광을 받던 밤섬도 근대화의 거센
물결에 밀리고 말았다.
여의도개발계획에 따라 56년8월 총면적 17만3,000여평중 4만7,000여평만
남기고 모두 폭파되는 비운을 맞았다.
4만트럭분의 돌은 여의도 윤중제를 쌓는데 쓰였다.
당시 밤섬에 살던 주민 62가구 443명은 서울시에서 마련해준 이주지를
마다하고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중턱 밤섬이 보이는 곳에 새삶의 터를
잡아 지금까지 모여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울시가 정도6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밤섬원주민 100여명을 초청,
22일 여의도고수부지에 "밤섬유래비"를 세운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밤섬에서는 옛날 "수중선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곳이 고향인 원주민들에게는 이처럼 뜨깊은 일이 없을듯 싶다.
"남쪽에서 온 새는 언제나 고향에 가까운 남쪽가지에 앉는다"는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고시의 한귀절을 곱씹으면서 국토개발계획에 밀려 고향을
잃은 수많은 실향민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1일자).
조선조초부터는 관원을 상주시켜 감초등 약초와 뽕나무를 많이 심고 양과
염소를 방목했던 탓으로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작은 섬이다.
밤섬에는 고려때의 명신 김<>가 손수 심은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가
있어 유명했고 주위의 푸른 버드나무숲과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장관을
이루어 "율도명사"는 마포8경중의 하나로 꼽혔다.
따라서 봄이나 여름철이면 배를 띄우고 청흥을 즐기는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관리들의 연회장이 되어 밤섬은 늘 붐볐다.
"세 갈래 물 한 쌍 섬을 두른 것이,/그 가운데를 백로주가 열렸다.
/작은 섬 물결따라 가지않고,/강중에 그대로 떠 있구나.
/주점 한 두 채 모래언덕에 있는데,/관청 밭은 나루터까지 다하았다.
/태평성대의 좋은 기상,/어부들의 피리소리가 마을 노래에 섞인다"
지봉 이 일 졸 광의 아들이며 인조때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동주 이민구
(1623~1649)가 밤섬의 풍광을 읊은 시를 보면 섬은 원래 2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은 밤섬이 비가 많이오지 않으면 여의도와도 이어지는
섬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밤섬의 아름다운 경관은 광복뒤까지 고스란히 남아 56년8월 이곳
백사장에서 사육제를 열어 풍류를 즐긴 문인들이 돌아오다 나룻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를 낸 사고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처럼 시민의 안식처로 각광을 받던 밤섬도 근대화의 거센
물결에 밀리고 말았다.
여의도개발계획에 따라 56년8월 총면적 17만3,000여평중 4만7,000여평만
남기고 모두 폭파되는 비운을 맞았다.
4만트럭분의 돌은 여의도 윤중제를 쌓는데 쓰였다.
당시 밤섬에 살던 주민 62가구 443명은 서울시에서 마련해준 이주지를
마다하고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중턱 밤섬이 보이는 곳에 새삶의 터를
잡아 지금까지 모여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울시가 정도6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밤섬원주민 100여명을 초청,
22일 여의도고수부지에 "밤섬유래비"를 세운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밤섬에서는 옛날 "수중선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곳이 고향인 원주민들에게는 이처럼 뜨깊은 일이 없을듯 싶다.
"남쪽에서 온 새는 언제나 고향에 가까운 남쪽가지에 앉는다"는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고시의 한귀절을 곱씹으면서 국토개발계획에 밀려 고향을
잃은 수많은 실향민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