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중반이후 수출이 본궤도에 오를 무렵 내가 신소재분야에 뛰어
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때 나는 대단히 야심찬
계획을 갖고 전자산업에 필요한 신소재 개발을 시도했었다.

이 제안을 내게 제의한 사람은 당시 김기형 과기처장관이었다.

그는 해방 직후 내가 요업협회 이사일을 할 당시 협회사무일을 보면서
면학에 열중하던 이였는데 이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전자관련 분야의
박사학위를 딴뒤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항공분야 신소재 연구를 했던 내
장남(현 김용주사장)의 미국대학 동문이었다.

그는 이 무렵 내게 집요하게 신소재분야로의 진출을 권유했는데 꼭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트럭으로 한 트럭 실어주고 돈 버나 007가방으로 하나 담아주고
돈버나 마찬가지이며 장차 국가적인 기간산업으로 육성해갈 첨단산업이니
전망이 밝은 신소재분야로 한번 진출해 보십시오. 신소재도 역시 요업
아닙니까"

때마침 국내에서는 전자공업이 발돋움하고 있었다.

이들 업체에서 신소재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의
국산화를 위한 기술개발을 할 결심으로 회사 설립을 결정했다.

"파인세라믹스"라는 신소재의 전자부품및 반도체소자를 만들어 삼성 금성
대한전선 모토로라등 국내 굴지의 전자업체들에 공급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78년10월, 나는 기술진을 뽑아 미국 알프레드대에 유학 보내
신소재를 연구하게 하고 펜실베이니아대의 신소재 연구팀을 초청, 기술공여
계약을 체결하고 또 국내의 장성도박사와 KIST와 기술용역계약을 맺은뒤
전자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경북 구미공단에 자본금 10억원에 투자액 38억원
규모의 행남전자기술요업(주)을 설립했다.

그런데 실지 생산에 들어가보니 상황은 예상을 빗나갔다.

KIST의 기술설계는 국제수준에 비해 채 시험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고
어렵사리 만들어낸 제품들마저 관련 전자업체들에서는 신소재의 결함으로
인한 위험부담을 꺼려해서 사용하려들지 않았다.

엄청난 기술투자비용과 제조비용에 반해 판매가 여의치 않으니 회사는
매달 적자가 누적되어 갔다.

창립 3년만인 81년8월 결산에 의하면 약 4억6,000만원 적자가 기록되었고
매월 8천만원의 적자비용이 지출되고 있었다.

그런 추세로 계속 간다면 매달 적자는 1억원을 넘어 6개월 이상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모기업인 행남사가 매달 이 1억원씩의 적자액을 지원해줄 만큼의
여력이 없었다.

결국 나는 81년9월, 창립 3년만에 매각을 결심했다.

더 이상의 적자액 지출로 행남사와 행남전자를 공멸의 길로 빠뜨려버릴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침 이분야로의 진출을 꿈꾸던 서울의 한 업자에게 은행부채 부담을
전적으로 맡기고 자본금분에 대해 현금 1억원과 어음 1억원을 받고 회사를
넘겼다.

적자액은 물론이요, 설립때부터 알게 모르게 들어간 그간의 경비는 온데
간데 없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후 이 회사는 (주)선광세라믹스로 이름을 바꾸고 착실한 성장세를 기록
했다.

내가 사업을 시작한 이래 이토록 참담한 실패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이일을 통해 자기의 기술능력없이 남에게 기술을 의존하는 사업은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