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모든 노력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개인마다 행복의 개념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행복해지려고 모든 사람은
애쓴다.

각종 경제활동이야말로 가장 명백한 행복추구 활동이다.

속된 말로하자면 "돈벌이는 행복 벌이"라고 할수있다.

돈을 벌려면 얼마쯤 수고를 해야하는데 돈이 약속하는 행복을 위해
싫어도 어쩔수 없이 수고를 하는것이다.

근대 산업사회는 행복을 얻기위한 각자의 노력을 되도록 줄이고
그에대한 보상으로서의 행복은 되도록 크게 만들어줄것을 약속한다.

"적은 노력으로 큰 행복을" "최소 노력,최대 행복"이 경제학의 최고
이념이다.

노력과 행복은 서로 반비례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합법적으로 불로소득할수만 있으면 그보다 더 행복스런 일은 없을것이다.

정부는 되도록 불로소득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서 시민의 행복 분량을
극대화해야 할것이다.

최고로 행복한 사회는 아무도 땀 흘리지 않고도 소득이 남아돌아가는
사회일것이다.

이야기를 이쯤 끌어오니까 어째 좀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모든 노력 땀흘림 애씀 수고는 행복을 얻기위하여 어쩔수없이 댓가로
치러야 하는 필요악인가.

사실상 그것이 필요악인 경우도 많다.

옛날 서양의 봉건사회에는 "종아리맞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봉건 영주의 아들이 못된 장난을 하든가 공부를 안하면
그 영주의 아들 대신 가정교사로부터 종아리를 맞는 것이 일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남의 매를 대신 맞아 주는 일이니 그 일은 분명히
극악한 형태의 필요악이다.

노예의 일은 대개 그런 종류의 일이었을것이다.

매일 매일 변함없이 일관 작업에 동원되는 노동자도 그런 일에서
속히 벗어나는 것이 꿈일터인데 다만 그런 뼈아픈 일의 댓가로 약간의
행복이 주어진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노동 해방이라는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설득력을 가지기도
하는것이다.

그러나 모든 땀흘리는 일이 노에노동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금전적 소득과는 전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노동이나 놀이는 물론
노동이라고 할수없으니 논외로 한다)소득과 직접 관련된 일이면서도
즐거운 일도 없지 않다.

사실은 없지 않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 정상적 사회에서는 일이란
대개 그처럼 즐거운 행위이다.

행복은 일의 결과일뿐아니라 일의 속성이기도하다.

일 자체가 행복이기도한것이다.

문제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행복을 도모한다는 경제원칙을
비뚤어지게 강조한 나머지 노력과 행복은 서로 반비례의 관계라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현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노력을 행복에 대한 댓가로만 치부한다면 그런
댓가는 되도록 줄여야 행복의 양이 많아지리라는 것은 초보적 계산이다.

이 계산에서는 땀 흘리는 일 자체가 즐거울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전혀 도외시된다.

그래서 불로소득이야말로 경제원칙에 가장 충실한 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이 되는것이다.

이처럼 일을 천한 것으로,악한 것으로,되도록이면 줄이고 피햐야
할것으로 선전하는 오도된 경제원칙이 선봉되는한,불로소득을 탓한다는것은
이율배반이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엄숙한 교훈만으로 일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생기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일 자체가 즐겁다는 본질적 사실을 일깨우고,일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한다.

또 일의 즐거움을 저해하는 인위적 요소들-나쁜 작업 환경,왜곡된
인간관계등-을 개선,제거해야만한다.

그리고 금전적 소득은 일의 댓가라기보다 일의 자연스러운 부수물이라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 "신경제" 계획의 일부가 되기를 경제학자
아닌 인문학자가 꿈꾸어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