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몇년간 행남사가 한창 호황을 누리던 1950년, 전쟁이 터졌다.

일이 잘풀리는가 싶더니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도 난 목포는 전선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별로 영향을 받지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전황은 급박해지고 급기야는 7월24일 인민군이 목포에 들어왔다.

그리고 인민군들이 들어온 다음날로 조업을 중단하고 나도 가족들을
찾아 피난길에 나섰다.

목포를 빠져나가려 하자 인민군들이 "아무 일도 없을테니 피난가지
마시오"라며 길을 막고 나섰다.

그러나 어렵사리 무안 망월리까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동안
틈틈히 공장을 둘러봤다. 이런 와중에 난데없는 일이 생겼다.

인민군들이 나를 체포해 행남사를 적산처리한다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던 용당동의 왕자제지주식회사란 공장을
해방직후 어떤 이가 이를 빌려 도자기공장을 한적이 있었는데 이를
잘못들은 인민군들이 행남사를 "적산"으로 알았던 것이다.

다행히 인근주민들과 종업원들이 이런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명해 위기를
넘겼다.

인민군들이 퇴각하자 나는 흩어졌던 종업원들을 불러모아 51년1월
곧바로 공장재가동에 들어갔다.

5개월여에 걸친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30여명의 종업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모여 일을 시작할수 있었다.

그것은 종업원들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회사일에 매달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해방과 6.25동안을 거치면서 식량사정이 극히 어려워 "보릿고개"라
불리는 춘궁기 용어가 통용되던 시절,나는 종업원들에게 쌀배급제도를
실시했다.

전쟁후 쌀 한가마에 6천원하던하던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2만원까지
뛰는등 쌀값 폭등현상이 심했는데 그때 나는 종업원들에게 가족수에
따라 무료로 가족 1인당 하루 5~6홉씩 계산해서 쌀을 배급해줬다.

이 쌀배급제도가 효과를 발휘하자 나는 또다른 묘안을 하나 내놓았다.

당시 산림보호정책으로 벌목이 금지된 터라 산에서 나는 땔감을 주로
썼던 일반가정의 연료난이 심각했는데 공장 가마에서 쓰고 남은
폐코크스를 종업원들에게 배급하게 했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명절이 돌아오면 사원들손에 꼭꼭 쇠고기와 술을 들려
보냈고 후로는 종업원들에게 매월 이발권 목욕권 극장권 신발권을
지급했다.

또 종업원 가정의 애경사에는 아무리 바쁜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내가
직접 참석해 관계를 돈독히 했다.

요즘말로 하면 일종의 사원복지제도인데 이렇게 힘이 한데 모아지자
종전에 한달 두가마씩 굽던 작업물량이 최고 네가마까지 구워낼 수
있었고 물건은 만들기가 바쁘게 팔려나갔다.

이렇게 여러가지 부대혜택이 많아지자 가뜩이나 일자리가 귀했던 목포
시내에서는 우리회사에 못들어와서 안달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아들 좀 직원으로 써달라"는 청탁이 쇄도했다.
작업률이 배가된 것은 물론이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종업원 출근체크를 하는 일이 없었다.

공장에서 집이 가까운 사람은 조금 빨리나와 공장을 정리하는 사이
집이 먼 사람들이 들어오면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일을 시작했다.

작업과정도 요즘처럼 성형 정형 시유, 이렇게 분업체계가 확실한 것도
아니었으니 원료작업이든 성형작업이든 관계없이 일이 바쁜쪽으로
옮겨다니면서 일을 도왔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