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회사를 만들 때에는 아버님이 거의 모든 것들을 결정하셨다. 일단
회사가 만들어진 뒤로는 아버님께서 회사일에 관여하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버님께선 당시 이미 50을 넘기신 연세였기 때문에 장차 회사를 이끌고
나가야 할 내가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하신 것 같았다.

각처를 수소문해 원료를 구해내는 일,종업원들의 기술지도를 하는 일,
그리고 장부정리를 비롯한 운영에 관한 일,이렇게 일인삼역을 치러내야
했다. 다행히 그때에는 요즘같이 대외관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때의 대외관계 일이라고 해봐야 기껏 세무서 직원을 상대하는 일
정도였는데,그 세무서 직원들조차도 주된 접촉대상자들이 당시 지주들
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물러나고 정작 해방이 된 후에는 행정관서,은행,기타
업무와 별 관련도 없는 기관들과의 섭외관계 일이 많아졌다.

명색이 경영자라고 하지만 종업원 30명 남짓의 식민지 경영인이
한가로이 지도감독만 할 처지가 못되었다.

낮에는 종업원들과 함께 작업복을 입고 원료작업과 성형,정형작업을
하는 한편 밤이면 화부와 함께 가마불을 지켜봐야 했다. 또 여기저기서
원료들을 구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즈음이야 사무기기들이 발달했고,교통도 편리하지만 그때에야 그런
것이 풍족할리 만무했으니 오로지 내 몸고생으로 대신하는 길밖에.
이렇게 바삐 서둘러 댔지만 소득은 그닥 시원치 않았다.

강제납품으로 판매가격이 낮은 데다가 인건비가 많이 들었고, 가동
초기라 원료를 구해오는 비용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었던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집 살림이 회사에서 일하는 여느 종업원들의 생활보다
크게 나을바가 없었다.

집사람은 꼭 한달 생활비를 정해서 받아 쓴 것이 아니라 내게 매일처럼
몇십전씩 받아서 가계를 꾸렸으니까.

그런데도 나의 내자와 어머님은 일언반구 불만을 내비치는 일 없이,
일년 열두달을 하루같이 점심부터 밤참까지 이어지는 종업원들의
식사를 해날랐다.

내게 남는 것은 오로지 강제납품이 풀린 후 자유경쟁을 통해 회사를
키워나갈 수 있는 기술축적 뿐이었다.

만일 그것마저 없었다면 나는 그때 공장을 차릴 설비자금으로 차라리
사채장사를 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이렇듯 저가의 공정가격으로채산성이 하도 낮자 나는 1945년6월 광주에
있는 전남도청 조정과로 찾아가 원가계산서를 첨부한 가격조정신청을
냈다.

그리고 "아무리 전시라지만 비싼 설비자금을 들이고 공장을 지어서
만들어놓은 제품을 이렇듯 헐값으로 출고하게 한다면 더 이상 공장을
운영해 나갈 수가 없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그들도 이제 더 이상의 무리한 통제를 계속할 수 없었는지 내게
가격을 조정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격조정 결정이 난
것이 해방된 3일뒤인 8월18일이었으니, 지지리도 나는 운이 없었던
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