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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금융실명제] (10.끝) 장영자로 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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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23일 오후6시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 현관 앞에 검은색
    쏘나타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멈췄다. 차문을 열고 내린 사람은 검은색
    투피스 차림에 빨간 서류가방을 든 중년 여인. 어느샌가 우루루 몰려든
    기자들이 여인을 둘러싼다.

    "부도액수가 모두 얼마입니까" ".." "1천억원이 넘는다는데 맞습니까"
    ".." 약 15분후. 이번에는 회색 콤비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도착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진 이유가 뭡니까" "나도 몰라요. 검찰에서 조사해
    밝힐 것입니다" "부도액수가 1천억원대라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만든
    숫자아닙니까"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았던 두사람은 5공시절인 82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영자여인과 그의 남편 이철희씨.

    당시 2천억원대의 어음사기사건으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고 감옥에
    들어갔던 "큰손" 장여인. 그가 12년만에 다시 검찰에 출두한 것이다.
    92년 4월 가출옥한지 1년9개월만에 다시 어음부도사건을 일으킨 것.

    사건이 처음 노출된 것은 올 1월8일. 장영자씨의 사위인 탤런트 김주승
    씨가 거액의 부도를 내고 해외로 잠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였다.

    그러나 이때만해도 이런 얘기들은 그저 흥미거리에 불과했다. 김씨의
    부도가 장영자씨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그럴듯한 추측"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5일 장씨의
    얘기가 오르내리는 이상한 금융사고가 금융계를 때렸다.

    사건개요는 이렇다. 동화은행 삼성동 출장소가 작년 11월 유평상사라는
    중소기업이 발행한 50억원짜리 융통어음에 대해 변칙적인 지급보증을 했고
    삼보신용금고가 이 어음을 할인해 줬다.

    그런데 유평상사가 한달 뒤 부도를 냈다. 삼보측은 동화은행측에 변제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서울민사지법에 소송을 걸어 사건이
    표면화된 것이다.

    문제는 이 유평상사의 실소유주가 다름아닌 "큰손" 장씨라는 것. 해외로
    도피한 탤런트 김주승씨가 발행한 어음도 유평상사가 지급보증해준 것으로
    알려지면서 금융가에는 1천억원대의 금융사고가 터졌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여기에다 장씨가 정치인에게도 담보를 제공하거나 선이자를 주는 방법
    으로 수억원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는 "풍설"도 나돌았다.

    야당에선 이 사건을 정치문제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새정부 출범
    이후 첫번째 터진 대형금융사건으로 전모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장씨의 과거 행적이 예사롭지 않은
    탓이다. 바로 82년의 "장영자사건"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5공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최고 권력자의 "안방"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전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씨의 동생이자 장씨의 형부인 이규광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으며 전대통령의 동서인
    김상구씨도 평통사무차장직을 떠났다.

    장씨 사건을 보고받은 김영삼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어떻게 이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느냐"며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것도 바로 그녀의
    "전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검찰은 서둘러 수사에 나섰다. 1월23일밤 8시 서울지검 10층 특수1부
    양인석검사실에서는 밤새 입씨름이 벌어졌다. 양검사와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장여인은 자정이 지나도록 범법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다.

    장여인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새벽 2시쯤. 서울신탁은행 압구정지점에
    예금한 돈을 장씨에게 불법 인출당했다고 주장하는 사채업자 하정임씨
    와의 대질심문에서였다.

    "은행도 내돈이 아니라고 하고 언론도 장회장 돈을 내이름으로 차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정말 억울합니다. 장회장,내가 언제 돈을 인출하라고
    했나요"하씨가 격한 소리로 따지고 들자 장씨는 고개를 수그리며 대꾸가
    없었다.

    이날 오후 장씨는 구치소안으로 사라졌다. 재수감사유는 삼보신용금고
    (서울소재)를 상대로 한 77억5천만원및 서울신탁은행 고객예탁금 30억
    원의 무단인출. 특정경제가중처벌법의 사기혐의와 부정수표단속법
    위반혐의를 받게된 것이다.

    검찰 조사결과 "어음전문가"인 장씨의 어음이 펑크가 나기 시작한 건 93년
    9월. 사위인 김주승씨가 (주)부산과 체결했던 장씨 소유의 부산 범일동 땅
    2천여평에 대한 매매계약이 해지되면서였다.

    이 땅은 조흥은행에 의해 근저당 가압류로 2백20억원이 묶여있었다.
    그런데도 장씨는 (주)부산과 매매계약을 맺고 73억원을 받은 것.

    조흥은행의 제지로 계약이 해약되면서 거액의 위약금을 물게된 장씨가
    어음남발과 은행사기를 하기 시작했다는게 검찰의 결론이다.

    장씨는 "어음전문가"라는 별명답게 어음을 "자금융통"의 주무기로 사용
    했다. 자신이 실질적으로 주인인 업체를 내세워 이들 업체 명의로 어음을
    발행해 금융기관이나 사채시장등에서 할인,자금을 조성했다.

    그는 소유부동산을 과시하거나 사채업자들을 동원해 지점장들에게 예금
    실적을 올려주는 수법으로 신용도를 쌓았다.

    금융기관이나 사채시장에선 장씨의 재산을 보고 종이쪽지에 불과한
    어음에 불법 보증을 해주고 할인해 주기도 한 것이다. 이런 수법으로
    1백7억5천만원의 사기를 저질렀다는게 검찰의 발표였다.

    이렇게 보면 여느 어음사기사건과 다를바 없다. 수법도 새로울 게 없다.
    "82년 사건"과 비슷했다. 오히려 사기사건의 규모는 과거보다 작고 관련
    업체들도 영세업체였다. 또 장씨의 말마따나 부동산이 제대로 팔렸다면
    부도를 막을 수도 있었을게다.

    "일반 금융사기사건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2건의 실명제 위반건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사건이 커진거죠"(진영욱
    당시 재무부 은행과장)

    개혁의 기치를 내건 문민정부가 "개혁중의 개혁"이라며 전격 시행한
    금융실명제를 비웃듯이 위반했다는데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5공정권이 내건 개혁의 기치를 날려보낸 장씨가 다시 문민정부의 개혁
    성과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장씨가 거액의 어음사기를 벌이게 된 것은 바로
    "실명제"때문이었다.

    작년 8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자 사채자금과 가.차명계좌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장씨의 어음사업이 위기를 맞았고,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어음을 돌려 자금을 조성하려 했다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장씨가 부산 범일동 땅을 팔려고 했던 작년 7월까지만 해도 자금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실명제 실시 이후 자신이 이용했던 사채전주들이
    지하자금을 실명화하면서 자금사정이 악화되자 어음을 급히 돌리는 수법을
    썼다"(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주선회검사)

    부산땅의 매각이 어렵게 되면서 장씨는 위약금등 98억원의 채무를 안게
    됐다는 설명이다. 장씨는 자신이 배서한 사위 김씨의 회사 "이벤트 꼬레"
    명의의 어음 석장을 (주)부산측에 주고 돈을 구하러 나선다.

    또 사채업자 하씨에게 접근, 서울신탁은행 압구정지점에 30억원을 예금
    토록한 뒤 불법인출을 하는가 하면 삼보신용금고에서도 77억5천만원의
    대출을 받는다.

    이과정에서 금융기관 관계자들이 실명제를 위반하게 된 것이다. 동화은행
    삼성동 출장소측은 장씨를 통해 사채업자에게 1백40억원의 양도성예금증서
    (CD)를 발행해 예금을 유치하면서 실명확인절차를 밟지 않았다.

    서울신탁은행도 장씨관련 인물에게 50억원의 CD를 발행할 때 실명확인을
    하지 않았다. 또 삼보신용금고도 장씨가 개설한 계좌에 차명 또는 도명을
    사용했으며 유평상사에 40억5천만원을 대출하면서도 명의를 빌리거나
    도용해 실명제를 위반했다.

    실명제가 실시된지 5개월이 지나 이젠 정착되는가 하는 시점에 엉뚱하게도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것도 과거 비슷한 수법의 사기사건을 저질러
    실명제 실시의 단초를 제공했던 장여인에 의해서.

    법상 죄값으로만 치면 실명제 위반은 별게 아니다. "긴급명령"에 따르면
    실명제 위반자에 대해선 5백만원 이하의 과태료등 행정처분만을 내리게끔
    돼있다.

    그러나 장씨 사건의 경우는 사안이 간단치 않았다. 실명제가 절름발이
    개혁이 아니었느냐는 여론을 몰고왔고 실제로 김대통령은 신문이 시커먼
    제목으로 뽑은 "구멍뚫린 실명제"를 보고 진노했다. 사태를 수습하는
    방법으론 일벌백계식 처벌이 제시될 수 밖에.

    서울신탁은행의 김영석행장과 동화은행의 선우윤행장등 2명의 은행장을
    포함, 6명의 임직원이 자진형식을 빌려 퇴진했다.

    이렇게 보면 이 땅의 실명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장영자여인이 낳아
    가꿔 놓은 꼴이다.

    82년5월 장영자 사건이 터지면서 그같은 금융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실명제 논의가 본격화됐고 94년 제2의 장영자사건을 계기로
    금융기관들이 실명제 규정준수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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