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8일 대림그룹계열의 증권회사인 서울증권은 정기주총을 열어
임기 3년의 새사장에 장한규동아렌탈회장을 선임한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4일만인 6월 1일 아침 장사장은 돌연 "사표"를
낸다. 결국 장사장은 단 이틀간만 온전한 사장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장사장이 "2일천하"로 물러난 이유는 뭘까. 서울증권측은 "과거의
금융실명제위반혐의와 관련,장사장이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해 자진 사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증권가에선 "자진사임이 아니다"는 말이 떠돌았다. 장사장이
선임된지 나흘이나 돼서 사의를 표명했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든 정책당국으로부터 압력을 받은게 아니냐는 얘기다. 자의든
타의든 여기서 그건 그리 중요치 않다.

장사장을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만든 "금융실명제위반혐의"의 진원을 다시
조명해 보자는 것이다. 정치유죄 사법무죄 작년 "8.12 실명제"실시이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동아투자금융사건. 장사장은 사건당시
동아투금의 사장이었다.

동아투금사건은 지난 8월24일 사건발생 1년여만에 "무죄"로 최종 판정
났다. 그러나 사건발생직후부터 최근까지 동아투금사람들은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회사전체가 실명제 얘기만 나오면 아직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당시 검찰에 고발됐던 동아투금 임직원 6명중 5명은 일찍이 무혐의(1명은
기소유예)로 판정났지만 실명제대책위원장이었던 배진성전무(현동아렌탈
부회장)에 대한 재판이 1년을 끌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이들 6인은 "8.24"판결에 따라 법적으로는 "죄없는 사람"들로 최종
신원을 받아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완전복권이 이뤄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장사장처럼 무혐의 판정을 받고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등 사실상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재판을 1년넘게 끌어야 했던 동아투금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당시 은행감독원이 밝힌 개요는 이랬다.

"실명제 실시 첫날인 8월13일 이모씨가 동아투금 강남지점으로 찾아왔다.
이씨는 평소 동아투금이 VIP로 우대하던 "큰손"고객.

이씨는 6월21일 "안창호"란 가명으로 개설한 CD(양도성예금증서)
종합보관통장의 명의를 실명제실시전에 실명으로 바꾼 것처럼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씨의 가명계좌에는 5천만원짜리 CD가 17장(8억5천
만원어치) 들어 있었다.

"큰손"고객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동아투금은 그날 영업이 끝난 뒤
밤11시부터 1시간 가량 전산을 고쳐,6월 21일자로 소급해 실명처리를
해주었다" 포인트는 종합보관통장의 이름을 소급해서 고쳐준게 "실명제
위반이냐 아니냐"는 점.

동아투금의 반박논리는 간단하다. 종합보관통장은 금융거래와 무관한
단순한 보관증서라는 것.

종합보관통장에 물건을 넣거나 빼는 것은 금융거래와는 무관하고 그런
만큼 금융실명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지난 24일 재판부(조승곤판사)는 "단순보호예수는 금융거래에 해당
되지 않는다는 실명제 주무부처의 유권해석에 따라 양도성예금증서통장
보관도 보호예수로 판단하고 긴급명령상의 금융거래가 아닌 것으로 믿었을
개연성이 크다"며 "따라서 피고인이 양도성예금증서를 실명전환했을 때는
그 내용이 긴급명령에 위반됨을 인지한 상태에서 고의로 실명전환해
주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무죄이유를 밝혔다.

재판이 끝난 지금은 과거의 얘기가 됐지만 당시 대책위원중 한명이었던
Z씨는 아직도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사건이 터져나온건 누군가의 경실련에 대한 제보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경실련에 들어간 내용은 이씨건과는 전혀 별개였어요."

큰손이 동아투금의 협조를 받아 거액예금을 실명제 실시전에 5천만원이하
단위로 쪼갠 것처럼 조작해 현금으로 인출했다"는게 제보내용이었는데
은행감독원이 아무리 검사를 해도 이것은 확인되지 않았어요.

제보내용을 조사하다가 엉뚱한 이씨건이 터진거지요. 이씨건이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으면 우리가 그렇게 어리숙하게 처리했겠습니까"

그러나 당시 여론은 동아투금으로 하여금 이런 항변의 목소리를 조금도
낼수 없게시리 돼 있었다.

"신문에 사과광고라도 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사과광고는
무슨..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는 식의 압력이 가해졌어요. 결국 아무
저항도 못하고 여론재판에 떠밀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Z씨의 얘기다.

동아투금이 옴쭉달싹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경재당시 청와대공보수석(현
공보처차관)의 예기치 못한 발언이 나오면서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이수석은 93년 8월 18일 오후 "동아투금사건은 금융실명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인가취소등 강경방안이 검토됐다"고 전했다.

이 발언은 즉각 동아투금의 예금인출사태로 이어진다. 19일부터 동아투금
본점영업부와 강남지점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소동"이 벌어진다.

인가가 취소되어 문을 닫기전에 돈을 빼내 가겠다는 생각을 가진 고객들이
장사진을 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즈음 이상한 일이 하나 벌어졌다. 예금이 한창 빠져나가던
21일 주식시장에서 투금사 주식들중 유독 동아투금 주가만 상한가를 쳤다.

전일 1만4천2백원이던 주가가 이날 1만4천8백원으로 오른 것이다.
동아투금직원들도 그 이유를 궁금해 했을 정도였다.

한 증권관계자의 얘기. "동아투금이 문을 닫을 가능성이 생겼으니 이
회사를 분석해봤죠. 그런데 이상했어요. 의외로 회사가 탄탄했어요.
주식을 사놓으면 회사문을 닫을 경우 자산을 분배할때 오히려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거죠"

사실 82년 설립된 동아투금은 좀 독특한 회사였다. 출범이후 그때까지
10년이상 부실채권이 한푼도 없다는 우리나라 금융기관사상 초유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실명제 충격의 부산물때문이었는지
지금은 부실채권이 좀 생겼지만.

이수석발언이후 동아투금은 정부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는 "정치논리"와
파산선고나 다름없는 인가취소로 금융시장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경제논리"의 기울기에 따라 결정될 운명이었다.

처음엔 "정치논리"가 강했다. 그 하이라이트는 "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
는 말. 당시 시중에서는 일부 언론 보도를 근거로 "이경식부총리가
동아투금사건을 거론하면서 "관계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고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재무부 경제논리승리 이말은 당시 동아투금 직원들에게 가장 참기 괴로운
얘기였다고 한다. 그런 심정을 반영해서였는지 당시 투금업계엔 이런
얘기도 떠돌았다.

"사업을 하고있는 이부총리 아들이 실명제실시 바로 얼마전 동아투금에
대출을 신청했으나 동아투금측에서 이를 거절했었다. 이 때문에
동아투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물론 이부총리는 "총." 운운한 적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일부 오해가
있었어요. "총으로 쏴 죽이겠다"는 얘기를 내가 했다고 나도 들었어요.
그러나 그건 억측입니다. 실명제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를
총으로 쏴죽이고 싶은 생각을 역으로 표현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동아투금사건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실시초기에 위반사항이
있으면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한 말은 "일벌백계"
뿐입니다"(이부총리)

어쨌든 이런 강공페이스가 힘을 얻어가는 와중에 재무부가 "국면전환"을
이끌어 낸다.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경제논리"가 "정치논리"를 잠재운
것.

은행감독원은 장사장과 실명소급전환을 결정한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6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모두 검찰에 고발,공을 사법부로 넘긴다.
우려했던 "인가취소"까지는 가지 않게 된 것이다.

어쨌든 동아투금사건은 당시 위력을 발휘하던 10월대란설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금인출소동"이 다른 금융기관들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에 대한 생각들이 커져간 것이다.

실명제 전격실시이후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던 10월대란설. "대란"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은 이 시나리오가 어디서 처음 시작됐는지는
명확치가 않다.

증권가나 명동 사채업자들사이에서 생겨나 금융권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는게 정설로 돼 있을 뿐이다. 이 10월대란설은 특히 정치권에서
크게 증폭된다.

"10월대란설은 당시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말이었죠.
과거 좋은 시절을 누렸던 인사들이 "좌절"과 "냉소"에다 "희망"까지
담아서 했던 얘기지요.

실명제가 정착되면 가.차명의 정치자금들이 계속 잠길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정치자금의 조달이나 유통이 한결 골치 아프게 될테고. 그래서
차라리 10월에 뭔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의 간접적인 표현이었죠"
(민자당 L의원)

전두환 노태우 두 정권에 걸쳐 10여년동안 실명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실명제가 실제이상으로 부풀려 있던데도 한 원인이 있다.

세번에 걸친 실명제작업에 모두 참여했던 재무부관계자는 "실명제가
여권이나 야권 모두에서 너무 과대포장되어 있었어요.

여권에서는 실명제를 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야권이나 재야에서는
실명제를 하면 곧바로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주장했지요.

심지어 일부에서는 실명제를 있는 계층의 재산을 없는 계층에게 나누어
주는 "계급혁명"적인 조치로까지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실명제가 이 정도로 과포장돼 있었으니 "난리"가 없는게 어쩌면 이상할
정도로 비쳐졌던게 당시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경제정의 우포장 정부는
"난리"에 대비해 실명제를 계속 보완해 나간다.

8월31일 재무부장관과 국세청장은 이례적인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국세청의 자금출처조사는 세금탈루혐의가 명백히 나타난 경우로
제한하겠다"며 국민들을 안심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정치권에서도 서서히 불만이 표출
된다. 정부는 9월24일 두번째 보완대책을 마련한다.

핵심은 "실명전환기간중 3천만원을 초과하는 현금인출에 대해서도
국세청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

"3천만원이상의 현금인출을 국세청에 통보키로 한 것은 막연한 불안감에
따른 현금인출러시를 막자는 의도였지요. 그런데 이게 금융거래를 막는
요인이 된것 같아요.

누적개념으로 생각했던 3천만원이 실명제 발표직후 의무기간 2개월에
걸친 순인출로 재해석됐고 결국 국세청조사를 않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지요. 3천만원이상인출 국세청통보는 실명제 작업팀의 가장 큰 실수
였다고 생각합니다"(양수길교통개발연구원장)

이런 보완대책덕인지 10월 대란설의 핵인 "10월 13일"(실명전환의무
기간이 끝난 다음날)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그날 종합주가지수는 740.39로 전날보다 무려 16.82포인트나 올랐다.